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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회지 생활에 심신이 지친 아내가, 장모와 처이모까지 유인해서는 산간 오지마을 00리로 훌쩍 귀농을 떠났을 때, 나는 아내의 느닷없고도 단호한 결정이 놀랍고도 존경스러웠다.

마을 어귀에 엉성하게 들어앉은 낡은 양철집을 임대하여 생활한 지 어느 사이 1년이 지났다. 딸아이와 함께 한 달에 한 번 꼴로 응원행차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두어 달 만에야 00리를 찾았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장모와 아내는 말다툼이 한창이었다.

"이런 꼴 보자고 귀농하자고 했냐? 때려치우고 서울로 가자."
"꼴 보기 싫다고 돌아서버리면…. 그건 비겁한 거잖아요."
"그놈이 마을에서 나가라잖아!"
"나가란다고 바보같이 쫓겨 가요?"

두 사람의 언쟁은 이미 티격태격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듯했다. 나도 모녀가 다투고 있는 연유를 어렴풋이는 안다. 그 마을의 마흔한 살짜리 이장 때문이었다.

오지마을 00리에선 지금...

00리는 이장과 같은 성바지가 3분의 2를 차지하는 집성촌이었는데, 이장을 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지금의 이장이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부랴부랴 고향 마을로 돌아와 이장 직위를 세습했다고 했다. 산간 오지마을의 이장 그게 무어 좋다고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도 내던지고 귀향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00리 사회'의 물정을 모르는 소리다.

우리가 00리에 처음 이삿짐을 부려놓고 인사차 이장 집에 들렀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장네 집 사립 위쪽의 언덕을 파고 들어가 방공호처럼 들어앉은 거대한 창고였다. 알고 보니 정부에서 주민들에게 공동으로 사용하라고 지어준 저온 창고였는데, 그 창고가 이장네 사립에 있다는 것이 조금 이상스럽긴 했다. 이장네가 아예 창고 열쇠를 독점하고 개인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트랙터를 가지고 있는 집 역시 이장네였다. 00리 인근에 수원지가 있는 관계로 상수원 보호를 당부하면서 수자원 공사에서 마을에 기증한 농기구였다. 그러나 그 트랙터를 운전할 권리는 오직 이장에게만 있었다. 이장은 트랙터를 몰고 가서 잠깐만에 예닐곱 마지기의 밭을 뚝딱 갈아 치우고는 일당을 받아 챙기거나, 그 대가로 자기 집 농사일에 사나흘씩 품을 팔아 갚도록 의무를 지운다.

의지할 곳도 가진 것도 없이 손녀딸 둘을 혼자서 거두고 있는 쉰일곱 살의 서씨 아줌마는 이장의 밥이었다. 마을 사람들 도장을 모두 쥐고 있는 이장은 영농자금 대출이 필요 없는 사람들 몫까지 자금을 끌어와서는 종자 값 비료 값이 없어 쩔쩔매는 서씨 아줌마 같은 사람들에게 꾸어주는 대신에, 하루에 1~2만원씩 쳐서 농사 품으로 갚으라고 통보한다.

아무리 자기 일이 바쁘더라도 이장이 호출하면 만사 팽개치고 달려가서 품을 갚아야 한다. 거절하는 날이면 밭을 갈아주지 않을 테고, 게다가 영농자금도 얻어다 주지 않을 건 뻔한 일. 이장네 농사 거드느라 정작 자기 농사일을 제때 못하다보니 추수를 해봐야 소출이 볼품없다. 다시 봄이면 이장에게 영농자금을 부탁하고 그만큼을 또 품으로 갚아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장 편의에 따라 움직이는 00리

이장네 집 마당에 있는 트럭 역시 오지마을 지원 사업으로 마을에 기증된 것인데 이장이 개인차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다 읍내 나가는 길에 그 트럭을 얻어 탄 사람들은 기름값 명목으로 5천원씩 차삯을 내야 했다. 아내가 승용차로 할머니 세 사람을 읍내까지 태워다 준 적이 있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5천 원씩 내미는 바람에 기겁을 하며 사양했다.

마을 회의가 열렸다. 한창 회의가 진행 중인데 이장 어머니가 갑자기 마을회관 문을 열고 들이닥치더니 아들을 향해 종 주먹을 뻗는다.

"농사일은 지천으로 밀렸는데 마을 일 한다고 밤낮으로 나다니면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이장 노릇 당장 그만둬!"

그러면 사전에 짠 각본에 따라 마을 들머리에 사는 이장의 오촌당숙이 점잖게 나선다.

"우리 그럴 게 아니라 내일은 전부들 나와서 이장 농사일 좀 거들어 줍시다."

부인은 지병으로 바깥일을 못하는데도 이장과 그의 노모가 단 둘이서 00리의 모든 노는 땅을 다 차지하고 농사를 지어내는 비결이 거기 있다.

농촌의 모습, 다 좋기만 할까?

도(道)에서 실시하는 우수마을 지원 사업에 응모한다면서 이장이 내 아내에게 그 준비를 부탁했다. 사진을 찍어 마을 홈페이지를 만들고 수십 가지의 서류를 준비하는 등 심사준비를 도맡아 하느라고 아내는 한 해 겨울을 꼬박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00리가 5억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우수마을에 선정되었다.

이제 다 써먹었으니 아내를 퇴출시키기 위한 이장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어느 날 주인영감이 나타나서는 10년간의 계약기간을 무시하고 당장 나가달라고 윽박질렀다. 그렇다고 선선히 물러날 내 아내가 아니다.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소리 말라며 보름 동안 농업기술센터에서 시행하는 농기구 운전교육을 이수하고 돌아왔다.

아내가 드디어 이장에게 트랙터 운전을 하겠노라고 열쇠를 내놓으라 했다. 이장의 대꾸가 이랬다.

"미쳤어. 여자한테 트랙터를 맡기게."

그럴수록 아내의 전의도 불타올랐지만, 아내는 그 오지마을의 파시스트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그만 건강을 해쳐 눕고 말았다. 아내가 말했다.

'나, 비록 철수한다만 곧 다시 돌아와서 이 음습한 착취구도를 부숴놓고 말 거야!'
공기 좋고, 고즈넉하고, 정겹고, 풋풋한 인정이 냇물처럼 흐르고…. 농촌의 모습이 다 그렇기만 할까? '아내의 00리'처럼 어느 오지마을 집성촌에서 또 다른 '이장'과 힘없는 '서씨 아줌마들'이 음습한 관계로 뒤얽혀 있을지 누가 아는가!

덧붙이는 글 | 이 원고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인권>잡지 5,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을 쓴 이상락님은 소설가로 '난지도의 딸', '동냥치 별', '누더기 시긴의 사랑'등의 작품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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