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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씻지 못할 죄로 인해 자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자네도 용하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내색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어제 알았다네. 그 아이를 만났지. 자네의 아들하고 말이지."

"내 아들…? 허허… 그렇군. 내 아들이라…?"

운중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중얼거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들이 아니라는 의미가 강했다.

"아닌가?"

"우리 모두 부모와 가족이 없었네. 그래도 형제라고 혈육이 남아 있는 사람은 혈간 뿐이었지. 우리는 가족이나 부모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련에 몰두해야 했네.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살아남기 위해서였지. 백 명 중에 아흔 다섯 명이 죽었고, 우리 다섯 만이 살아남았네. 그리고 나와 본 세상은 우리의 삶이 짐승과도 같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지."

또 다시 과거다. 노인들은 과거를 먹고 산다. 언제나 누렇게 바랜 상태로도 그들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아무런 명령도, 할 일도 없이 나와서 보았던 세상… 너무나 신기했네. 자네는 나오자마자 환자를 붙잡고 병을 고쳐주더군. 약재상에 가서는 형편없는 약재를 놓고 판다고 마구 화를 냈었지."

중의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자신이 고련한 의술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의원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자네 역시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가 빙당호로를 입에 넣으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곤 했다네."

과거는 그랬다. 그렇게 동정오우는 탄생했고 세상에 첫 발을 딛었었다. 그들에게 야망이 없었으니 원하는 것도 다툴 일도 없었다. 회는 그들에게 육 개월이란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던져주고 방임했다.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 간 모든 것이 엄격한 통제 속에 살아온 그들에게는 오히려 당황스런 시간이었다. 그 간 죽음보다 더 지독한 고련의 대가로 주어진 휴식 기간이었음에는 분명했지만 그것 역시 세상을 빨리 알게 하려는 수련의 한 과정이었음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우리는 모여서 그랬지. 우리에게는 왜 가족과 가정이 없을까? 그 때는 정말 혈간이 부러웠네. 그는 돌아갈 고향이라도 있었으니까…. 서먹하기는 했지만 끌어안고 울 수 있는 동생들이라도 있었으니까…."

"그 때부터 자네는 그렇게 혈육에 집착했지. 아니 우리 모두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야. 다만 자네가 조금 더 강했을 뿐이고, 그것을 우리보다 더 표현했던 것이지. 회에서 그리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평범한 가정을 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까지 얻은 것은 자네의 욕구와 갈망이 그만큼 컸다는 증거였을 거야."

운중의 눈 깊숙한 곳에 아련한 아픔과 함께 얼핏 분노가 스쳐지나갔다. 산 위에 묻혀있는 처와 자식이 떠올랐음일까?

"또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에 매달리는군. 확실히 나이를 먹긴 먹은 것 같으이…. 하지만 이제 그만 두세…. 내 과거의 기억은 언제나 누런빛으로 바래있네."

아픔은 언제나 가시가 되어 운중의 마음 깊숙한 곳을 헤집는다. 애써 잊으려 한들 잊혀질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삶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운중은 금방 평상시의 얼굴빛을 되찾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나는 절실하게 혈육을 원했지만 결국 얻지는 못했네. 그 아이는 내 자식과 다름은 없지만 내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아니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 아이가 정말 운중의 자식이 아니란 말인가? 중의는 믿을 수 없었다. 운중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운중은 거짓말을 하기보다 입을 다물어 버리는 성격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누굴까? 어떻게 운중과 연관이 되어 잇는 것일까? 여하튼 운중의 자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의는 오히려 얼핏 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염치없는 부탁이네만…."

중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운중의 성격은 매우 강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여린 구석이 있다. 차갑고 냉정한 듯 하지만 누구보다 친구를 위하고 참아주는 너그러움도 있다. 결정을 하면 무섭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는가 하면 결정하기 위해 머뭇거리는 성격도 가지고 있다.

"자네 말대로 자네의 다섯 번째 제자인 교학이는 내 아들이네. 자네가 그토록 갈망하고 있었듯 나 역시 마찬가지였네. 그러다가 기회가 주어졌지.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네."

중의의 얼굴에 간절한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아주 확고한 의지가 엿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자네는 우리 다섯 가운데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군."

"부인하지는 않겠네. 자네들이 비난한다 해도 변명하지도 않겠네. 하지만 자네가 아니라 내가 얻은 자식이라도 자네들의 자식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중의의 얼굴이 술을 마신 듯 붉으레하게 달아올랐다. 중의는 와락 운중의 손을 잡았다.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그 아이에게 이 모든 것을 줄 수 없겠나? 그 아이가 날개를 달고 중원만리(中原萬里)를 날 수 있도록 해줄 수 없겠나? 그래 이제 다섯 중 셋이 남았고, 그 아이는 자네 말대로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혈육이네."

어찌 보면 가증스러운 부탁이었다. 아주 이기적인 부탁이었다. 운중의 처자식을 죽이는데 동조하고는 이제 자신의 혈육을 위해 도와달라니…. 허나 그것이 부모의 마음일 터였다. '자기 자식만큼은'이라는 단서는 그 어떤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운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런 부탁을 하는 중의가 미운 것도 아니었다. 간절하게 바라보는 중의의 눈을 보며 운중은 탄식을 불어냈다.

"자네는… 너무 터무니없는 일에 매달리는군…. 아니지…. 아니야…. 자네의 망상과 탐욕을 버리라고 할 수는 없지."

운중은 처연한 눈길로 중의를 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지금 나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나는 그저 용인하고 있을 것이네. 누구를 돕지도, 말리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간섭하지도 않을 것이네. 그저 지켜볼 뿐이지."

친구의 욕심을 채우는데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자네…?"

"천지(天地)는 누구의 독점물이 아니네. 모든 사람의 것이지."

운중은 나직하게,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중의는 운중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저것이 운중의 마음이었던가? 그동안 그리도 참아왔던 운중의 마음속에 저런 신념이 있었던가? 중의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부대끼고 살아가는, 천지간 존재하는 모든 사람(人)의 것이고, 또한 그 안에서 인간들 간 어떠한 갈등과 분쟁이 있더라도 이 세상은 언제나 순리대로 가는 법이다. 그리고 천지가 세상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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