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가슴 아프지만 공주도 유배지로 떠나라

태종 이방원은 반역을 도모하려 한 이거이를 엄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을 뿌리치고 이거이 부자를 고향 진주(鎭州)로 유배 보냈다. 이거이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과 그 아들 이저의 상당군(上黨君) 직첩도 폐하여 서인으로 축출했다. 뿐만 아니라 이거이의 둘째 아들 청평군(淸平君) 이백강도 서인으로 폐했다.

헌데 여기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불거졌다. 청평군 이백강은 태종 이방원의 사위이고 자신의 딸 정순공주의 지아비가 아닌가? 현존하는 임금의 딸 왕실의 공주가 서인으로 강등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태종 이방원에게는 개인적인 부녀의 정보다도 정치가 우선 순위였다.

태종 이방원은 아비로서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공주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딸이 수행하는 이거이의 유배 길에 대언(代言) 노한과 김과를 보내 중로에서 위로하게 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또 다시 소동이 빚어졌다. 유양이 들고 일어났다.

"죄인들이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어찌 그리 영광스럽습니까? 또 대언(代言)을 난신적자(亂臣賊子)에게 보내는 것이 옳습니까? 대언은 어찌하여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난 뒤에 가지 않았습니까?"

"주상이 강제하신 까닭으로 부득이 어명을 받들었을 뿐입니다."

임금을 대리한 지신사 박석명이 궁색한 답변을 했다. 태종 이방원은 좌대언(左代言) 이승상을 불러 공신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지난 일은 책임을 묻지 않겠다, 하지만 용납은 하지 않겠다

"지난 무인년과 경진년간에 있었던 일은 공신들 가운데 길(道)이 같지 않아 발생한 일이다. 만약 지금의 일이라면 이거이가 어찌 나를 미워하겠는가? 다만 그가 미련하여 국가에 간범(干犯)되었을 뿐이다. 여러 공신은 이제부터 경계하여 이와 같은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 것이며 마음을 같이하여 왕가를 좌우에서 도와주면 참으로 다행함이 크겠다."-<태종실록>

태종 이방원이 거론한 무인년은 이렇다. 당시 왕은 태조 이성계였고 세자는 방석이었다. 오늘의 임금 이방원은 아무런 직책 없는 야인이었다. 왕자의 난이라 칭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축출할 때 개국공신 이거이가 혁명동지 이성계에게 심정적으로 동정을 보내고 이성계의 사위 이저가 인간적으로 이성계에게 경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허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진년도 그렇다. 강한 태종보다 무른 정종이 신하들의 입장에서 더 좋다는 표현은 이거이의 행동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평지풍파를 일으켰을까? 여기에서 태종 이방원의 통치술이 드러난다. '용서는 하되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공개 청문회를 열어 여론을 환기하고 경종을 울려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복안이다.

지난날은 용서하되 도전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만천하에 공표한 태종 이방원은 지신사 박석명과 대언 이승상을 조용히 불렀다.

"경들도 내 뜻에 따르지 아니하고 공신의 뜻을 따르겠는가? 공신이 이거이의 죄를 청하거든 그 말을 출납(出納)하지 말라."

이거이 효과는 이미 달성되었으니 더 이상 번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허나, 신하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의를 지키려는 것인지 과잉충성인지 알 수 없다. 좌정승 조준이 백관을 거느리고 예궐했다.

"신 등이 상소하여 이거이의 죄를 청하였는데 전하가 열람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그 소장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내가 공신을 보전하고자 하는데 정승도 또한 그 뜻을 알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왔는가?"

"이거이의 죄가 중(重)하므로 법대로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경등이 법대로 이거이의 죄를 다스리고자 하는데 그렇다면 죽이자는 것인가? 내가 공신을 보전하고자 하는데 공신들이 내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심히 불가하다."

"난신적자는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요 왕법에 따라 마땅히 토죄(討罪)하는 것입니다. 왕법은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서는 아니 됩니다. 전하는 이거이 부자의 공을 생각하여 머리를 보전하고 고향에 안치하고자 하나 이것은 부질없는 인애(仁愛)요 종사 만세의 계책은 아닙니다."

혁명동지를 죽일 수 없다

"내가 진실로 공신을 보전하겠다고 하여 이미 황천(皇天) 후토(后土)에게 맹세하였는데 만약 이거이 부자를 죽인다면 나는 마땅히 천년(天年)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다. 무인년의 공은 오로지 이저에게 있고 경진년의 공은 오로지 이거이와 이저에게 있다. 또 사정(私情)으로 말한다면 이거이의 아들 이백강은 나의 사위이다. 청하는 것이 비록 간절하고 지극하나 내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태종실록>

"법이란 천하 만세에 함께 하는 것이요 전하가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거이의 죄에 관대하시니 신은 사직이 위태로워질까 두렵습니다. 춘추(春秋)의 법에는 난신적자는 먼저 베고 뒤에 아뢰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하가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면 신은 마땅히 옛 법을 따르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무엄하기 짝이 없는 협박성 발언이다. 신하들의 뜻은 강경했다. 대언 유양이 총대를 메고 너도나도 충성 경쟁에 뛰어들었다. 4년 전 일이기에 가슴에 묻어두어도 될 일이었지만 만당에 터트려 여론을 조성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펼친 한판 굿이 이제는 탄력을 받아 어디까지 굴러갈지 예측 불허다.

이거이를 죽이자는 신하들의 상소와 상언이 빗발쳤다. 충성 경쟁이 들불처럼 번진 것이다. 더 이상 방치하면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통제 불능상태에 빠질 것만 같았다. 이쯤에서 제동을 걸지 않으면 피바람이 불 것 같았다. 그것은 태종 이방원이 원치 않은 결과다.

"경이 이러한 말을 발(發)하니 내 몸도 또한 보전할 수 없겠구려! 이거이를 진주(鎭州)에 유배하겠다는 결정은 되돌릴 수 없다."

마침표를 찍었다. 이거이의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하들의 주청에 떠밀려 이거이를 죽인다면 삽혈동맹의 맹세를 깬 사람은 자신이라고 질타하는 백성들의 눈초리가 두려웠던 것이다. 이거이를 진주로 내려 보낸 태종 이방원은 개국공신과 정사공신 그리고 좌명공신을 대청관(大淸觀)으로 불러 맹세의 의식을 가졌다.

"무조건 충성하라" 그렇지 않으면 후손에게도 재앙이 있을 것이다

"조선국왕 신(臣) 휘는 개국 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을 거느리고 감히 황천(皇天)의 상제(上帝)에게 고(告)하고 종묘사직과 산천의 여러 신령에게 굳게 맹세합니다. 삼맹(三盟)의 신하들이 맹세한 뒤에는 충성으로 서로 믿고 은애로 좋아하고 친애하기를 골육같이 하고 굳건하기를 금석 같이 할 것입니다.

맹세를 어기거나 두 가지 마음을 품거나 참언을 꾸며 흔단을 만들거나 붕당을 나누어 결당하거나 나라를 경복하기를 꾀하거나 같이 맹세한 이를 무함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천지를 속이고 군부(君父)를 저버리는 것이니 반드시 왕법이 있을 것이며 죄는 그 몸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재앙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맹세식에 참석한 사람은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 66명 이었다. 삼공신(三功臣)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무시무시한 맹세식이다. 주는 것은 적고 받는 것은 많다. 무조건 충성하라는 것이다. 맹세를 어기면 그 후환이 자손까지 미칠 것이라는 협박성 맹세다. 맹세식을 마친 신하들을 태종 이방원은 무일전으로 초치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맹세식이 끝난 후 이거이 부자에 대한 정치공세는 수그러들었지만 끝나지 않았다. 공주가 난신적자의 아들과 혼인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은 불가하니 이혼시키라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신하들의 주청을 일축했다. 오히려 유배지에 있는 이저와 이백강을 왕도에 불러들여 위로했다. 이 모습에 신하들이 또 다시 성토하고 나섰다.

"사사로운 정으로 난신적자의 아들을 경도에 불러들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임금과 신하의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세월이 흐른 훗날 태종 이방원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저와 이백강에게 직첩을 돌려주고 왕도에 살도록 허락했다. 이거이는 왕도에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태종 이방원에게 이거이는 왕권에 도전하는 위험인물로 기억되어 있었다. 이방원이 세자로 있을 때 정종 임금이 군사를 삼군부(三軍府)에 통합하는 군부개편을 단행했다. 이 때 모든 절제사들이 병권을 삼군부에 반납했는데 오직 이거이와 이저만이 병권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판의흥삼군부사 이무가 논박하자 '한 덩어리 고기'라고 조롱했다. 벨 수 있다는 뜻이다. 왕명을 어긴 자를 추궁하는 신하를 벨 수 있다는 것은 왕을 벨 수 있다는 불괘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이다.

#이거이#이저#정순공주#청평군#하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