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조정환 문학평론가
ⓒ 이정환


영어 발음이 좋아진다는 이유로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혀 밑의 얇은 조직을 절개하는 수술을 강요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난달 31일 열린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에서 조정환 문학평론가(아래 호칭 생략)가 "'수술'에서 드러나듯 신체 구조 변화까지 시켜야 할 정도로 절박하게 다가온 영어의 강요 현상을 기존 국어 강요와의 대립보다는, 국어 시대가 영어 시대로 연장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토론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상상변주곡' 7번째 시간에서 조정환은 '삶 문화와 공통어 문제'란 제목의 주제 발표를 통해 이같이 주장하고 "소설가 복거일씨로부터 촉발된 영어공용론을 둘러싼 주장들은 비정규직, 실업자, 장애인 등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들과는 별 상관없는 기득권 간의 분파적 논쟁"이라고 강조했다.

영어공용론 논쟁은 신자유주의 대 민족주의 논쟁 구도와 흡사

이와 같은 조정환의 주장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에게 국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언어적 창의성이나 표현 방식을 표준화·규격화시키는 것"이요, "체득하면 할수록 국가 이데올로기를 유능하게 집행하는 하인으로 편성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강력한 정치적 명령"일 뿐이다.

ⓒ 이정환
따라서 "민족주의적으로 우리 말의 세계화를 주장하는 것"이나 "사회 구성원을 평가하는 척도로서의 기능이 더 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은 "국어 자체가 갖고 있는 본성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조정환은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될 테니, 그때까지 국어와 영어를 이중으로 사용하자"는 소설가 복거일씨의 '영어공용론' 주장을 "영어를 '준칙' 삼아 신자유주의적 삶을 살게 만들려는 특정 지식인의 노력"으로 규정하고 "<조선일보>와 삼성 등으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영어공용론' 지지 비율이 현저하게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조정환은 "영어 강요 현상은 국가 단위에서 세계 질서로 편입되는, 국가 체제 전체가 지구 제국의 하나의 마디로 재편되는 과정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며 "근대를 국어와 보냈다면, 탈 근대를 영어와 함께 보낼 운명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조정환은 영어공용론을 둘러싼 논쟁이 "비정규직, 실업자, 장애인 등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들에게는 다른 동네의 싸움일 뿐"이라며 "이 논쟁은 정치·경제 등 우리 사회 거의 모든 지형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자유주의 대 민족주의 논쟁 구도와 흡사하다"고 주장했다.

교량적 언어, 공통어를 사용하자

그렇다면 조정환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는 먼저 "공용어는 국가의 언어로 명령의 언어이며, 다양한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특이어' 또는 '소수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이에 대한 예로 인터넷 언어를 들었다. "명령어에서 벗어나려는 젊은 세대의 나름의 노력" 또는 "다수가 사용하는 표준어에서 벗어나고자 개개인이 사용하는 특이한 표현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정환은 "이와 같은 '특이어' 또는 '소수어'는 비토나 고립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만큼, 이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공통어가 필요하다"면서 "공통어는 언어적 다양성을 살리면서 서로 수평적 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조정환은 공통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모델로 에스페란토어를 제시했다. 그는 "교량적 역할을 하는 공통어에 대한 필요성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코멘스키 등 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됐던 문제"라며 "이와 같은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에스페란토어"라고 소개했다.

이어 조정환은 "1년 동안 배웠는데 영어보다 훨씬 쉽고 조어·표현 능력이 탁월하더라"면서 "비록 유럽에서 나온 공통어지만, 수평적 소통을 꾸려내는 대용적 언어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끝으로 조정환은 공통어 활성화 조건으로 "적대·경쟁 대립 관계를 벗어나는 창의적인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민족국가를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하며, 미국 주도의 지구 제국을 '용해'시켜야 한다"면서 "'인류인'주의적인 인간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에스페란토어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통어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토론에 참석한 정희진 여성학자(왼쪽),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왼쪽).
ⓒ 이정환
아버지 연장으로 아버지 집을 부술 수 있나

이에 대해 여성학자 정희진은 "복거일씨나 그에 반하는 민족주의적인 주장 그리고 공통어 역할을 강조한 주제 발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며 "조정환 선생님도 보편성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않은 것 같다"는 말로 주제 발표 자체에 공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정희진은 이어 "같은 한국 사람이라도 남성과 여성 언어가 다르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그것이 다르다"면서 "사회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다면, 언어가 달라도 소통이 가능하다"고 주장, 주제 발표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 인식을 나타냈다.

또 정희진은 "아버지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 없는 것처럼, 근대적인 방식으로 질문하면 탈근대적인 답을 절대 찾을 수 없다"면서 "'쓰레빠 란닝구 빤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영어가 퍼진다고 민족어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기원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주장했다.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도 "주제 발표에 나타난 소수어의 예로 게이들이 사용하는 은어를 들 수 있는데, 그들 은어에서 나타나는 '반 여성성'을 감안하면, 소수어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면서 "언어적 게토(ghetto, 분리거주지역)에 갇혀 사는 소수자들이 공통어를 통해 접합할 가능성은 비관적"이라는 말로 '공통어 대안'의 현실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한편 8회 토론회는 '민주화 20년, 철학적 사유의 변화와 모색'을 주제로 오는 7일(목) 저녁 7시에 서울 배재정동빌딩 B동 1층에서 열린다. 8회 토론회를 끝으로 마무리되는 '상상변주곡'은 '풀로엮은집'이 기획·진행을 맡았으며,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와 6월 민주항쟁 20년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있다.


태그:#상상변주곡, #영어공용론, #조정환,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 대토론회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