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용추의 말을 흘려들은 듯 했지만 그 역시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운중보가 그 순간부터 회의 관할이 아니라 보주의 관할로 변하게 된다는 점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좌등이 한쪽 어깨를 사용할 수 없다면 승부는 광나한 쪽에 무게를 더 실을 수 있소. 광나한이 비록 허명뿐인 소림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어느 경지까지 올랐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신중한 그가 충동적으로 그랬을 리는 없소. 나름대로 자신이 없었다면 이런 시기에 좌등에게 숭무지례를 청하지 않았을 것이오."

상만천이 애써 안심을 시키려는 듯 말은 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 말한 것도 같았다.

"믿어 보아야지."

"하지만 패할 경우도 대비해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광나한을 믿고 있다가 패한 경우에 어찌할 것인가? 용추가 다시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추태감이 용추와 상만천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자네의 의도는 충분히 알았네."

용추는 계속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누가 먼저 손을 내밀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이런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이다. 일방적인 구애는 가치가 없다. 상대 역시 충분히 손을 잡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가져야만 자연스러운 동조가 되는 것이다.

이곳에 들어온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고, 다시 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려면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 주위 상황이 이러한데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협력 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다. 추태감 역시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논하기 이전에 본관은 재보와 먼저 해결할 일이 있네."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다. 어차피 상만천이 온 이상 이 자리에서 매듭을 짓는 것이 편하다. 추태감이 시선을 돌려 상만천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허망한 꿈을 접을 생각은 없는가?"

구구절절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또한 상만천이 왜 이곳에 들어오는 모험을 했는지도 알고 있다. 자신 역시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이곳에 들어왔으니까. 상만천이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태감께서는 접을 수 있겠소?"

"자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군. 아무리 단절된 운중보라 하지만 전서구 하나면 자네의 모든 것은 사흘이 지나지 않아 무너지게 될 것이야. 역모(逆謀)란 구족(九族)이 아니라 자네의 영역 안에 있는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만들 것이니 말이야…. 본관은 자네의 명확한 역모 증거 몇 가지를 확보하고 있다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위협이고 협박이었다. 추태감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분명 자신은 이제 삶의 목표를 상인으로서의 최고가 아니라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를 꿈꾸고 있다. 이미 쇠락해질 대로 쇠락해진 대명의 운명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방의 청(淸)은 북경의 코앞까지 다가왔고, 지방의 호족들은 이미 자신만의 세력을 확보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거기다가 불알 없는 환관의 기세는 이미 황상의 권력을 능가하고 축재하기에 정신이 없는 상황. 지금 중원은 임자 없는 땅이다. 자신에게는 다른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재력이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땅의 주인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협박도 상만천에게 먹힐 리 없다. 어차피 세상이 뒤집어지면 자신이 쌓아놓은 모든 재산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결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위태감과 더불어 태감께서 황상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고 계신 것은 아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허수아비 황상을 모시는 일도 지겨워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회를 위해서도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좋네."

"최소한 나에게도 태감께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을 능력은 있소."

발목을 잡을 능력은 분명 상만천에게 있다.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상만천을 처리하는데 망설였던 것이다. 아무리 황상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신이 황제가 될 수는 없다.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모든 조건을 충족해야 하고 무엇보다 민심이 기울어야 가능한 일이다. 막강한 군문을 완전히 장악했더라도, 허울뿐인 황실이라도 명분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회였다. 세 개의 머리가 있는 회를 한 손에 틀어쥐면 대업을 준비하기 쉬워진다. 그 때문에 자신도, 상만천도 이곳에 들어왔음을 안다.

"철담의 피살에 자네가 관여되어 있나?"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상만천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혈간의 피살은 태감의 지시라고 알고 있소만…."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은 곧 바로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과 다름없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멈췄다. 아무리 나아가도 합쳐지지 않을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추태감의 얼굴 표정이 미세하나마 순식간에 여러 번 바뀌었다. 그만큼 마음 속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의미일 터였다. 그것은 상만천 역시 마찬가지. 이미 언제부터인가 세 명의 회주가 천지간 존재하는 사람을 위해 결정하고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위해 실행하며 대명(大命)을 위해 회가 존재한다는 근본적인 원칙은 무너진 지 오래다.

그동안 많은 회주들이 회를 한 손에 장악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뜻을 이룬 적은 없었다. 견제와 균형은 회를 만든 초창기부터 존재했고, 한 사람이 틀어쥐기에는 다른 두 회주의 존재가 너무나 큰 장벽이었다.

헌데 지금 회주 하나가 사라졌다. 위급한 상황이지만 이런 시기일수록 회를 장악하기 가장 적절한 시기임을 추태감과 상만천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에 들어온 터.

이윽고 추태감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본관을 돕는다면 본관은 자네에게 일인지하(一人地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위를 주겠네. 대를 물려가며 말이야."

권력의 속성을 알고 있는 상만천에게는 코웃음을 치게 하는 말이었다. 역대 권력자들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는 오래 갈 수 없는 위치였다. 대를 물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말이었다. 만인지상일지라도 이인자(二人者)는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도 일인자가 가장 먼저 숙청하려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겉으로는 아주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무서운 선택을 강요하는 말이었다. 추태감은 이미 속내를 드러냈다. 이제 이것을 거부하면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부터 죽이려 들 것이다. 추태감은 가끔 무모한 데가 있었다. 그것이 두려워서는 아니었지만 그 피해는 이곳에 들어온 목적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잃게 하기 충분할 것이다.

"이러면 어떻겠소?"

이럴 땐 잠시 예봉을 비껴가는 것이 좋다. 그는 한 마디 던지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뜸을 들였다.

"들어온 목적은 태감과 같소. 태감께서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 우리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소. 당연히 지금 우리로서는 내분지란을 일으킬 때는 아니라 생각하오. 아직까지 우리는 회를 이끄는 두 사람이오.”

"……?"

"그 일은 이곳을 나간 뒤 결론을 내는 것이 어떻겠소? 그래보았자 이틀뿐이오."

"오월동주(吳越同舟)라…?"

추태감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 역시 상만천이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를 안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이틀을 늦춘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오히려 이곳을 나가게 되면 자신에게 더욱 유리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