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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11일 저녁 9시 10분경. 역 구내에서 화약수송열차가 폭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폭발사건으로 49명 사망 등 1000여명의 인명피해와 80여억원의 재산피해, 그리고 90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함께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이리역 열차 폭발사건'이다.

그 당시 네살배기였던 필자에게는 흐릿한 기억조차도 없는 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이후 어느 날 고 이주일과 가수 하춘화의 일화가 매스컴에 소개되면서 다시 세간의 화두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리역 열차 폭발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면 나에게는 1991년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당시의 여행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이리역의 추억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게 만들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의 일이 돼버린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철부지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해 본다.

벌써 몇 번이나 잠에서 깨 시계를 쳐다봤는지 모르겠다. 이 순간 만큼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시계 초침을 보며 마냥 넋 놓고 있다가 알람은 제대로 맞추어져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빨리 해야 떠라, 해야 떠라' 속으로 수없이 되새기며 잠을 청해보려 했으나 잠은 오지 않고 이런저런 걱정으로 멀뚱멀뚱 눈을 뜨고 날을 샐 태세다. 비 오면 안 되는데…. 온갖 걱정을 혼자 떠앉은 채 이렇게 잠을 설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들과 떨어져 시골 친구들끼리만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건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친구들이 다같이 여행을 떠나기로 한 곳은 신선이 놀고 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아름다운 섬 '선유도(仙遊島)'였다.

친구들은 모든 계획을 짜 놓고 제각기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약속장소인 서대전역에 모이기로 했다. 드디어 날이 밝고 당시 대전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나는 부모님의 허락을 뒤로 한 채 무작정 짐을 챙겨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서대전역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날씨도 마치 친구들의 첫 여행을 축하라도 하듯 햇살은 뜨거웠지만 맑고 화창한 전형적인 여름의 하늘을 보이고 있었다. 약속장소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뭐 빠뜨린 건 없나? 얼마나 걸릴까? 가서 뭐하고 놀지?' 등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다.

서대전역에 도착하자 이미 몇 몇 친구들이 도착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핸드폰이나 삐삐가 없는 관계로 약속시간까지 역에 도착하는 사람은 같이 가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허락을 받지 못해서 같이 가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기로 이미 통보를 한 상태여서 일단은 다 도착하기를 기대하며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같이 가기로 한 친구들이 모두 모여 즐거워하며 표를 끊기 위해 대합실 안으로 이동했다. 그때는 예매라는 것이 없어서 서로 먼저 표를 사기 위해 우루루 몰려갔다. 또 이 시기가 직장인들의 휴가가 몰려 놀러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표를 사기 위해서는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 지난 2000년 사라진 비둘기호의 내ㆍ외부 모습. 내부에 달려있는 선풍기가 인상적이다. 이제는 철도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 철도동호회
기차 시간을 살펴보던 일행들이 만장일치로 탈 기차와 시간을 정했다. 우리 친구들을 이리역(지금의 익산역)까지 데려다 줄 기차는 이제는 사라진 추억의 '비둘기호'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비둘기호'는 완행열차였고, 에어컨 대신 기내 천정에 선풍기가 돌아갔고, 역이란 모든 간이역까지 다 정차했고, 심지어 동네분들이 세워달라면 역이 아닌 곳에서도 서는 그런 기차였다.

그 당시에는 기차의 종류도 최상급이 주황색을 띤 무궁화호, 다음이 녹색을 띤 통일호, 제일 완행이면서 시설도 좋지 않았던 마지막이 파란색의 비둘기호밖에 없었다.

비둘기호는 요금은 저렴하지만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이 비둘기호를 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이 많이 타는 무궁화호나 통일호는 복잡하기 때문에 피한 것도 있지만 차비를 아껴서 차라리 먹을 걸 더 많이 챙기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일행들은 비둘기호를 타고 첫 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후회하고 말았다.

더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냄새며 소요되는 시간 등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다. 이제는 후회해도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먹을 걸 더 사고 안 사고를 떠나서 조금 더 빨리 도착해서 여장을 풀고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게 놀 것을' 하며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은 서대전역에서 익산역(예전 이리역)까지 무궁화호로도 한 시간여 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당시 비둘기호를 타고 갔던 이리역은 왜 그리도 멀게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기억으로는 3시간은 족히 걸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우리가 탔던 비둘기호에는 기내 이동판매대(일명 '탱크')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지, 이 비둘기호에서 즐길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같이 여행하는 일행들끼리 게임을 하거나 또는 집에서 준비해 간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먹는 즐거움 뿐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다 같이 삶은 달걀을 깨먹으며 기차 여행을 즐겼고, 다같이 모여 게임을 하며 마음껏 추억을 만들어 갔다(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 기차여행의 즐거움은 단연 삶은 달걀을 깨먹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기차를 타고 나서 잠깐 동안의 즐거움일 뿐 점점 길어지는 기차 여행 속에서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다. 이럴 때쯤 드디어 일행이 탄 비둘기호는 이리역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나니 이미 점심때가 훌쩍 지나 있었다.

일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이리역 주변의 음식점을 찾기 시작했다. 아니 자장면집을 찾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자장면집을 찾은 일행들은 게눈 감추 듯 한 그릇을 뚝딱 해 치우고는 다시 선유도로 가는 배가 기다리고 있는 군산행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 동안 잠깐이었지만 일행 모두는 이미 기차여행에 지쳐서 골아 떨어져 있었다. 군산에 도착하자 일행은 선유도로 들어가는 배편을 알아보고 배를 탔다. 배를 타고 약 1시간 30분 동안 들어가서 마침내 신선의 섬인 '선유도'에 도착했다.

▲ 시골 친구들과 부모님곁을 떠나 처음으로 놀러갔던 선유도에서 친구들과 섬을 둘러보고 있다. 왼쪽은 선유도의 상징인 선유대교를 건너오는 모습. 왼쪽사진 맨 오른쪽이 필자.
ⓒ 김동이
친구들은 섬에 도착하자마자 3일 동안 우리가 묵을 텐트를 설치했고, 일부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등 본격적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걸어서 섬 전체를 둘러보기도 하고, 밤에는 손전등을 켜고 불빛을 향해 기어나오는 어린 바닷게를 잡으며 짧았던 3일간의 여행을 즐겼다.

선유도의 아름다운 정취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비둘기호의 악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리역에 도착하자 비둘기호를 탈 차비 밖에 없던 친구들은 모두가 숨겨두었던 비상금까지 톡톡 털어 절대로 비둘기호는 타지 않겠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내 저었다. 아마도 아직까지 올 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올 때는 '통일호'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탔던 '비둘기호'를 뒤로한 채.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둘기호'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


태그:#이리역, #비둘기호, #선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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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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