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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버그린. 늘 푸른 나무처럼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로 남고 싶다.
ⓒ 문종성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와 오바마 중 누굴 지지하시나요?"

잠시 생각에 잠긴 교양 넘치는 이 노부인은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질문에 답했다.

"난 앨 고어가 마음에 드는데요? 잘 생기고, 일도 잘하는데. 하하. 음, 글쎄요. 난 오바마보다는 힐러리가 더 좋아요. 오바마는 국제적인 감각이 조금 떨어진다고 봐요. 정치 경험도 일천하고. 하지만 힐러리는 매우 영특하죠. 그런데 그것도 참 꺼려지는 게 만약 힐러리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 정부는 클린턴과 부시의 양 집안이 수십 년간 계속 나눠먹기식이 되기 때문에 그것도 그리 긍정적인 면은 아니라고 봐요. 뭐 어쨌든 난 힐러리가 좀 더 낫다고 봐요."

포킵시에서 만난 상냥한 시골 인심

뉴욕 주의 5월은 이미 오후 6시가 넘은 시간에도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만큼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 뉴욕 주에서 동쪽에 있는 중소도시 포킵시(Poughkeepsie) 어느 작은 레스토랑 야외 식탁에서 상냥한 노부인 커니(Connie)와 정치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이 상황에 난 그저 웃음만 나온다. 그녀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상관없이 매우 활기차고 사람을 살갑게 대하는 친근함이 서려 있다.

"9ㆍ11 사건은 아직도 마음이 너무 아파요."

차마 버지니아텍에 대한 사건을 말하기가 어려웠던 난 화제를 9ㆍ11로 돌렸다.

"그래요. 굉장히 안타까운 사건이죠. 난 무엇보다 사람들이 미국을 싫어한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슬퍼요."

그녀는 짐짓 우는 표정을 익살스럽게 연기했다. 그녀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재빨리 위로의 말을 건네야만 했다.

"아니에요, 커니. 사람들은 미국을 싫어하지 않아요. 부시와 미국 정부를 싫어하는 거지. 미국에 대해서는 다들 좋게 생각해요.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미국 유학을 꿈꾸고 또 저도 이렇게 미국 여행을 하고 있잖아요."

"고마워요. 갈렙(caleb, 내 영문이름은 갈렙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은 불합리한 나라에요. 난 특히 총기 사용을 허용하는 것에 대해 무척 못마땅하거든요. 우리 남편도 총기 사고로 죽었어요."

그녀의 유감스런 발언에 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음의 보조를 맞춰주었다. 그렇다. 커니는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의 대외적인 시각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국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잘 이해하고 또 공감하는 편이었다.

길을 물어보다가 만난 그녀는 저녁 식사가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조국에 대한 애정과 비판을 적절히 견지하면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대화의 주제는 무거웠지만 그녀는 각기 다른 소스로 양념 된 터키식 케밥을 두 개나 시키면서 여행객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뭐 좀 더 드실래요?"

미국의 시골 인심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는 않은가 보다. 무거워졌던 마음이 한 노부인과의 만남을 통해 유쾌하게 바뀌어버리다니….

본격 주행 첫날부터 불운을 겪다

5월 15일. 처음으로 아침부터 페달을 밟아보는 본격적인 일주가 시작된 날이다. 각종 장비를 넣은 앞뒤 패니어에 카메라 가방을 핸들에 달고, 뒤 짐받이에는 다시 가방 하나와 텐트, 침낭, 공기 매트리스 이외에 잡다한 것을 그득 실었더니 그 무게가 쌀 한 가마니가 훌쩍 넘는 듯하다.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챙긴 나는 결국 그 욕심에 대한 책임의 고통을 여정 내내 감내해야 할 듯싶다. 여기에 70kg가 넘는 나의 무게가 더해지면 이 자전거가 앞으로 얼마나 버텨줄지 의문과 걱정을 가져 보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페달을 밟아보니 방향 잡기가 수월찮다.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점점 더 다리의 근육을 움직여 아침을 밀어내고 나의 길을 간다.

▲ 미국은 워낙 면적이 넓어 개간하지 않은 땅도 많다. 드넓은 목초지에 가축들을 방목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문종성
아침에 마크의 환송을 받고 출발한 지 10시간여 만에 도착한 포킵시는 IBM연구소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밴더빌트 저택 국립사적지가 있는 중소도시이다. 이곳의 소수의 한인들 역시 대부분 IBM사에 근무한다. 하지만 이곳을 오는 동안 자전거 여행 최초로 장비를 잃어버리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더위와 갈증으로 힘겹게 언덕을 넘다가 엘리나라는 노부인이 점심을 대접해 줄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없었던 오늘 낮이었다. 뉴욕 주라고 해서 나름 번잡한 도로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언덕이 많고 드넓은 땅에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은 광활한 대륙에 대한 도전을 쉽게 허락할 용의가 없는 듯 보였다.

▲ 엘리나(Elina). 지나가던 나에게 스튜베리와 땅콩버터를 가득 바른 빵과 주스를 제공해 주었다. 미국의 시골 인심은 우리 나라의 시골과 별반 다를게 없다.
ⓒ 문종성
아침부터 오후 내내 한참을 달리다 포킵시 입성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타는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을 기대하며 한 자동차 정비소로 들어갔다. 특별히 물 인심은 어느 곳에서도 나쁘진 않은데 자동차 정비소라면 99% 냉수 대접을 기대해도 좋다. 이들은 뜨겁고 고된 작업장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상시 물을 준비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정비소 앞에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물 한 모금 마시려는 찰나 자전거가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짐을 정리하다 보니 뒷짐받이에 매어놓은 공기 매트리스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달리다가 줄이 조금은 느슨해진 걸 알았지만 설마 하는 마음에 가다 나도 모르게 짐이 빠져버린 것이다. 그냥 일반 매트리스를 구입할까 하다 장거리 여행을 생각해 공기로 조절할 수 있는 고급 매트리스를 선택했는데 이거 낭패다.

마음을 추슬렀다. 물건은 잃어도 마음만은 잃지 말자고 생각했다. 이미 자전거 세계일주를 통해 세 번쯤은 잃어버리겠거니 마음먹은 터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주행을 하고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기면 곤란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짐을 단단히 동여매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떨어진 지점이라도 알면 좋으련만 먼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도 부담스럽고 해서 앞으로 직진하기로 한다.

하지만 불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랜 고생의 끝에 내리막길이 나왔을 때였다. 난 그전까지 오르막길에서 힘겹게 자전거를 밀고 올라간 고생에 대한 대가를 받고 싶어 신나게 브레이크를 풀고 다운힐을 즐겼다. 이 순간 그 누가 짜릿한 속도감에 대해 과감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뒤에서 경적 울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도로 쪽에 바짝 붙어 가는 거라 안전에 이상 없고, 내 권리 내가 찾는다는데 누구도 간섭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운전사의 경적 소리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이 봐, 자네 짐 떨어졌으니 뒤를 돌아보라구! 이 얼간아!'

자신의 차선 확보가 아닌 나를 생각해줘서 울려댄 경적 소리를 그렇게 무시해 버린 것이다. 한참을 스릴있게 내려오고 나서야 뒤가 허전해 돌아보니 이번엔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한 슬리핑백이 또 사라진 것이 아닌가.

'맙소사.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짐을 흘리다니.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딨나. 바보바보. 으이그 멍청이.'

망연자실. 다운힐을 하다가 잃어버렸으니 경사진 도로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과 200달러가 훨씬 넘는 고가의 장비에 대한 미련 때문에 다시 왔던 길을 힘겹게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한참을 찾아봐도 슬리핑백은 이미 누군가 'Thanks God'을 외치며 가져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 도로 곳곳에는 교통사고로 널브러져 있는 동물 사체들이 보인다. 작게는 쥐 종류에서 도마뱀, 크게는 너구리와 고양이 등 종류도 다양하다. 문명의 이기로 희생당한 이들을 통해 인간의 삶을 반추해 보게 된다.
ⓒ 문종성
"삶이란 우리의 인생 앞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 존 호머 밀스

Life is so, so. 이곳저곳 교회 청년들과 자전거 비전트립에 대해 나눌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다니엘을 통해 은혜를 받았다면 기꺼이 사자 앞에 서보기도 해야겠고, 욥을 통해 도전을 받았다면 내 모든 소유를 잃고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한 내가 바로 그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욥처럼. 하나의 테스트라고 생각했다. 또다시 마음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다. 여기서 마음이 무너지면 앞으로 또 다른 숱한 난관에 적잖게 당황하고 흔들릴 것 같아서 말이다.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포킵시에 도착한 것이다.

300달러어치 짐 잃고 100달러짜리 매트리스 찾고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커니는 내 말을 듣더니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몰라 차와 음식을 더 주문하겠느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이미 충분히 배가 불러요. 커니, 당신 덕분에 정말 귀한 대접 받았어요. 고마워요.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웃음을 지어 보인 나에게 커니는 평온한 미소로 시선을 맞추었다.

"별 말씀을. 갈렙의 대단한 용기에 찬사를 보내요. 어디를 가든지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힘내요 멋진 친구!"

▲ 뉴욕주에서 누리는 풍요로운 삶이 좋다며 이 곳에 머무는 커니(Connie). 그녀의 마음 또한 풍요로움으로 가득차 있다.
ⓒ 문종성
커니와 헤어진 후 찾아가기로 한 교회로 다시 핸들을 돌렸다. 하지만 작은 포킵시 타운에서도 도로 이름만 가지고 구역을 찾기란 그리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길을 물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던 길을 멈추고, 또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재차 물어보거나 다른 곳으로 전화 연락을 통해 길을 가르쳐 주려고 했지만 그들의 친절도 모두 헛수고다. 더욱이 경찰마저도 생각만큼 지리 파악이 되어 있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은 더 가중된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이러다 노숙하는 거 아냐? 아냐,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어쨌거나 포킵시에는 들어왔으니 찾기야 하겠지.'

햇살이 서쪽 하늘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추위는 갑자기 찾아온다. 져지(자전거용 의류)만 걸치고는 추위를 견디는 게 만만치 않지만 윈드 재킷을 꺼내기 위해 짐을 푸는 건 더 귀찮은 일이다. 순간 스치는 생각에 택시 기사야말로 나의 구세주가 될 거란 믿음이 용솟음쳤다. 아니나 다를까 택시 기사는 부처님 손바닥 보듯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자, 이제 됐다. 목적지가 정확히 나왔으니 이제 힘차게 페달을 밟는 일만 남았다.

밤이 내렸다. 포킵시 북쪽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왔던 길을 역주행해서 다시 동쪽으로 가야 한다. 자전거 여행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바로 이때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입이 삐죽 튀어나왔지만 최대한 빨리 가는 것이 어쨌거나 나에게도 이로운 일이었다.

아까 슬리핑백을 잃어버린 아픈 기억의 도로를 벌써 세 번째 지나친다. 마음은 이미 평온해졌다.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통의 극치처럼 근육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경사진 곳을 한참 되돌아 올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아까 잃어버린 공기 매트리스가 도로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게 아닌가? 야호!

300달러어치 짐을 잃고 100달러짜리 매트리스 하나 찾았을 뿐인데도 이렇게 아이처럼 신난다. 마음을 비웠더니 예상치 못한 일을 마주하고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기쁨이 앞선다. 주변에는 카메라 삼각대가 이미 깨져 있어서 다시 가져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다 그렇고 그런 거지. 입가에 만면의 웃음을 머금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시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역시 날 버리지 않으시는군.'

아침 8시에 출발한 주행은 밤 9시를 3분 남기고서야 겨우 외딴 지역에 있는 한인교회를 찾고서 마칠 수 있었다.

"문종성 형제님이신가요? 오시는데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이한 목사님의 음성을 들으니 이제 좀 마음이 풀린 것 같다. 노곤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온수에 샤워를 했다. 천국이 무엇인가. 내 마음이 천국이면 내가 어디 있더라도 천국이 아니겠는가. 샤워를 하고 시원한 음료를 들이켜는 이 순간의 짜릿함이야말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힘들었던 하루였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은 시간이었다. 삶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 그래서 자전거 여행은 인생을 관조하는 투명한 창이 아닌가 싶다. 이제 그 목사님의 섬김이 뜨겁게 진행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현재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 머물고 있으며 보스턴을 경유해 몬트리올로 갈 예정입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입니다.


태그:#세계여행, #자전거, #세계일주, #문종성, #비전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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