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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꽃
솔꽃 ⓒ 윤희경

푸르른 오월은 풀과 나무들의 세상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새소리로 산 전체가 두런거리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비단 목청을 찰찰 굴리며 꾀꼬리 한 쌍이 소나무 사이를 헤집어 수선을 떨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송홧가루 흩날려 소나무 주변이 노랗게 물들어갑니다. 5월 열이레 바람에 밀려온 꾀꼬리 소리와 알싸하고 달착지근한 송진 냄새, 송홧가루들이 한데 어울려 코끝이 벌름거리고 귀청이 꿈틀댑니다. 소나무가 불러온 축복된 순간들입니다.

솔잎은 수천 개가 한데 어울려 가족을 이루고 오밀조밀 뾰족이 모여 삽니다. 오월이면 시리도록 푸른 새벽 찬이슬을 받아 마시고 하늘빛 청동 저고릴 갈아입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잠자리 같이 하는 날 암수가 한 몸 되어 수많은 꽃을 피워냅니다.

솔 꽃이 벌릴 땐 소나문 제 정신이 아닙니다. 솔잎마다 살갗을 비비고 송화 가루를 토해냅니다. 송홧가루들은 한 순간에 터져 나와 숲 속 대청소를 하고 풀과 나무들의 얼굴을 씻겨줍니다.

송화가루
송화가루 ⓒ 윤희경

솔 꽃 여물어 솔방울로 크자면 다음 해 구시월은 되어야 열매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니, 사람보다 더한 뱃속 저림을 겪은 후라야 하나의 씨앗을 탄생, 긴긴 인고의 나날과 뼈아픈 속앓이로 방울 한 송일 길러내는 정성이 놀랍다 할 것입니다.

햇 솔방울
햇 솔방울 ⓒ 윤희경

집에서 아이를 낳던 시절, 애기가 태어나면 금줄을 매달고 새로운 생명 탄생을 축복했습니다. 금줄을 외로 꼬아 대문 앞에 걸어 놓고 계집아이면 숯과 솔잎을, 사내아이면 솔과 고추와 숯 껑을 꽂아 새 생명이 태어났음을 온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곤 하였습니다.

송홧 가루를 말려 다식을 만든다
송홧 가루를 말려 다식을 만든다 ⓒ 윤희경

어제는 송화를 따러 산에 올랐습니다. 송홧가루는 피어나기 전에 서둘러 따다 말려야합니다. 송홧가루를 가붓이 비벼 물에 일어 잡티를 걸러낸 다음 간수 했다가 제사나 명절 때면 다식을 만들어 씁니다. 그러면 조상님들도 아득한 옛날 향수에 어린애처럼 좋아들 하십니다.

소나무 갈비. 솔잎의 마른 낙엽으로 솔가리라고도 하며 아궁이의 좋은 땔감이 된다.
소나무 갈비. 솔잎의 마른 낙엽으로 솔가리라고도 하며 아궁이의 좋은 땔감이 된다. ⓒ 윤희경

송화를 따다 지루하다 싶으면 푹신푹신한 소나무 갈비를 밟거나 깔고 앉아 오월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솔잎이 많은 세월을 두고 쌓이고 쌓이면 갈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 보드랍고 따스합니다.

연탄이 보급되기 전엔 솔가리(갈비)는 최고의 땔감으로 대우를 받았습니다. 노란 갈색 갈비 나뭇짐은 농부들의 예술작품으로 솔잎을 모아 다듬어 아름다움을 뽐내곤 하였습니다. 불쏘시개나 약한 불을 사를 때면 노란 불꽃이 일어 싸한 냄새를 풍기며 아궁이를 서서히 달구어내곤 하였습니다.

ⓒ 윤희경

지금 소나무 밑 갈비를 깔고 앉아 충만한 오월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언제 보아도 변치 않는 푸름과 올곧은 고집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엔 눈 덮인 산야에서 청청하고 시린 모습으로 우뚝하고 의젓하더니, 오늘은 남서풍에 청아한 소리와 고아한 운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하얀 부분들이 햇송진입니다. 불을 살을 때 광솔로 사용하면 쉽게 불씨가 붙습니다.
하얀 부분들이 햇송진입니다. 불을 살을 때 광솔로 사용하면 쉽게 불씨가 붙습니다. ⓒ 윤희경

바람 불어 청솔가지들이 울렁일 때마다 바위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서늘한 바람과 넉넉한 그늘 아래 몸을 기대고 달착지근하게 묻어 내리는 햇 송진 냄새를 맡다 보면 어느새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을 건너갑니다. 까무러치도록 머리와 가슴을 헹궈 짜내는 5월, '아, 어쩌란 말이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오늘입니다.

나는 소나무가 좋아 솔바우 마을(松岩里)에 삽니다. 소나무만 있으면 밥 없어도 배부르고, 솔 소리면 좋은 음악도 바랄 바 아닙니다. 날마다 가슴에 푸르고 옹골찬 또 하나의 소나물 심고 가꾸어 장자(莊子)의 피리 소리와 도연명(陶淵明)의 지팡이 끄는 울림을 되새김질하며, 가는 세월을 낚다가 소나무 아래 한줌 흙이 되려고 합니다.

이제 막 수풀 속을 헤집고 다가온 솔바람 한 자락, 시리도록 푸른 오월의 한낮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아, 어쩌란 말이냐….'

ⓒ 윤희경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우측 상단 주소를 클릭하면 쪽빛 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송화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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