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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 그는 언제나 '젊은 그대'인 '작은 거인'이다.
김수철, 그는 언제나 '젊은 그대'인 '작은 거인'이다. ⓒ (주)리메인
작은 거인, 젊은 그대, 못다 핀 꽃 한송이, 작은 키, 동그란 뿔테 안경, 신들린 기타 연주, 깡충깡충 뛰는 동작, <서편제> 음악 작곡, 원 맨 밴드(One Man Band)….

'김수철'이라고 할 때 기자가 그냥 떠올릴 수 있는 코드들이다. 7080 콘서트를 즐겨 보는 세대라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16일 서울 광화문 한 레스토랑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만난 김수철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쉰을 넘긴 나이(51)지만 베이지색 윗도리에 검은 티를 받쳐 입고, 검은 챙모자에 역시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쓰고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내달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서 펼쳐질 데뷔 30주년 기념 특별공연의 제목을 '영원한 젊은 그대!'로 단 것도 일단 외모에선 충분히 이해가 됐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김수철입니다."

그가 일어나 꾸벅 인사하는 것으로 식사를 겸한 1시간 30분 가량의 기자간담회는 시작됐다.

"나는 정말정말 행복한 사람"

"77년 '퀘스천'이란 그룹으로 KBS 방송에 출연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딱 만 30년이 됐어요. 그런데 솔로가 된 이후 실제 단독콘서트로는 처음이죠. 제가 과거를 돌아보거나 하는 성격이 아닌데, 그래도 제 노래나 음악을 사랑해주신 여러분 때문에 제가 계속 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거든요. 그래 이번엔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그동안 히트곡들 10여곡이랑, 잘 안 알려졌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 또 국악 맛뵈기로 <서편제> 음악, 기타산조, '황천길'을 들려드리려고 해요."

특별 출연으로는 대중음악 쪽에선 한대수·해바라기·나무자전거, 국악 쪽에선 그와 함께 국악 작업을 했던 김덕수(사물), 박용호(대금/소금), 김용운(피리/태평소) 등이 무대를 함께 꾸민다.

- 밴드는 예전의 '작은 거인' 멤버들인가요?
"그 분들 연세가(웃음)? 가요계도 제 또래가 있어요? 거의 없죠."

기자 누군가가 이문세씨 이름을 댔다. "이문세…. 그 친구가 하고 있죠. 근데 밴드 아니죠. 밴드는 달라요. 무거운 기타를 메고, 쉽지 않아요. 롤링스톤즈나 에릭 클랩튼 같은 분들이 그 연세에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하시는지…(웃음)."

기자들의 직업의식의 발동인지 경쟁심리의 작동인지, 이번에도 예외없이 짓궂은 질문들이 앞다퉈 던져졌다.

- 한 때는 잘나가는 록커였다가 공백기도 있었는데, 서러운 30년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지?
"음악 하는 사람치고 나처럼 행복한 사람 드물다고 보거든요. 영원한 인기는 없어요. 마이클 잭슨도 입산하면 하산하고, 대통령 임기기간 있듯이 그걸 장담할 수는 없죠. 제 음악의 길을 계속 가는 거예요. 영광스럽게도 우리나라 국가 행사의 음악을 작곡했고요. 공부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구요. 그리고 대중음악을 했는데 다른 분야에서도 나름 인정을 받았구요. 그래 행복해요."

그는 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 88년 서울올림픽 전야제, 97년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개막식, 그리고 2002 한일월드컵 조추첨 및 개막식 음악을 작곡했다.

- 젊은 세대들이 잘 모르는 데 대해 혹시 아쉬움은 없는지?
"아, 없다니까요, 글쎄. 제 얼굴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도 '치키치키 챠카챠카'(90년 KBS TV에서 방영했던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주제곡) 때문에 다 알아요. 얼굴을 모를 뿐이지."

그는 웃으며 "'치키치키 챠카챠카'가 내 수준에 딱 맞는다"고 했다. 거기에 덧붙이는 얘기.

"우리는 잘난 체에 약해요. 사실 공부하다 보면 잘난 체할 수 없죠. 만날 부족한 것만 느끼는데…. 저를 잘 몰라주셔도 괜찮아요."

그는 간담회 도중 계속 '공부'를 강조했다. "전진하려면 계속 공부해야 한다"며 "공부할 게 너무 많아 벅차다"고도 했다.

음악천재, 그러나 "음악이 뭔지 정리가 안 되네"

"저는 쭉 제 길을 가고 있는 거죠."
"저는 쭉 제 길을 가고 있는 거죠." ⓒ (주)리메인
- 막연한 질문인데 김수철에게 음악은 무엇인지?
"아, 그거 어려운 질문인데…, 너무 어렵다…. 음악은…, 제가 좋아해서 시작했고, 좋아하다 보니까 궁금한 게 많았고, 궁금한 것 쫓다 보니까 부족한 게 많았고, 그러다 보니까 공부하게 됐고. 제 노래를 좋아하시는 가요 팬들이 제 음반을 사시고, 그 돈으로 제가 음악을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었던 거거든요. 거기에 감사드리는 마음이 항상 깊이 있어요…. 음악이란 뭔지는 정리가 안 되네. 거기밖에 얘기를 못하겠네(웃음)."

- 그럼 가수 김수철의 꿈은 무엇인지?
"가수에 국한되지 않고, 저는 음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구요. 동서양 지구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을 작곡하는 게 제 꿈이에요. 거기를 향해서 초지일관 갈 거죠, 죽을 때까지."

그 꿈을 위해 그는 국악과 양악을 접목한 크로스오버 작업을 많이 시도했다. 특히 전자기타로 우리 가락인 산조를 작곡, 연주하는 '기타산조'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최초로 만들고 계속 발전시켜온 것도 그같은 집념의 산물이었다.

'못다 핀 꽃 한송이'로 KBS 가수왕 등 무려 16개 상을 휩쓸고, 영화 <고래사냥>(배창호 감독) 병태 역으로 백상예술상 신인상을 받았던 84년 최정상의 위치에서 그는 국악공부 시작했다. 이후 계속 이어져온 그의 남다른 '국악사랑'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악 녹음은요, 가요판의 두세 배가 더 들어요. (제가 낸) 가요음반은 10장 정도인데, 나머지 30장은 국악판이에요. 잘 계산할 수는 없지만 최하가 5000에서 2억~3억까지 든다고 치면 그게 얼마예요. 그러니까 저는 돈이 없어요. 다 음악 한 거예요."

그의 '국악사랑'은 '외사랑'이 아니었다. 정통 국악계로부터도 인정받았다. 1991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남북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공연을 펼쳤다. "그때 우리나라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이 다 오셔서 공연했어요. 그때 국악인 아니면서 유일하게 저만 이방인으로 기타산조를 연주했죠."

- 록을 했다가 국악을 했다가 하니 대중에겐 이것저것 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도 가질 수 있으나 사실 '작은거인' 밴드 시절부터 국악공부 시작한 거거든요. 작곡해놓은 거를 나중에 발표한 거예요. 제가 턴한 게 아니에요. 작은거인 시절에 기타산조도 이미 구상했어요. 다만 수박 겉핥기로 한 거였고, 그래 공부해야겠구나 생각한 거거든요. 발표된 음반으로 평가하니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거로 보이지만, 저는 주욱 제 길을 가고 있는 거죠."

그 길을 가는 여정에서 <칠수와 만수> <서편제> <태백산맥> 등 영화, <사랑이 뭐길래> 등 드라마, <날아라 슈퍼보드> 등 만화영화,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 등 뮤지컬, 그리고 <불림소리> 등 무용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장르에 관계없이 작곡 자체가 재미있다"고 했다.

575장 팔리고 폐품처리된 <국악음반 1집>

현재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만능' 음악인이지만 그도 데뷔 전 '대학가요제 같은 것' 예선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

"코드 딱 한번 쳤다니까요. 그 당시는 고고(가 대세) 아니에요. 그런데 저는 록을 했거든요. 한번 꽝 쳤는데, 심사위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나가라고 그래요. 그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했는데, 나가라고 그래. 그래서 나랑 안 맞는구나 생각했죠."

하지만 결국 78년 작은거인 그룹으로 참가한 대학축제 경연대회에서 '일곱 색깔 무지개'로 그룹부문 대상을 차지했다. 이후 30년의 음악인 생활은 언뜻 순탄해 보인다. 그에게 음악생활 하면서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을까.

"(힘든 시기는) 무지하게 많았죠. 30년 기간을 팍 압축시켜서 히트곡은 <못다 핀 꽃 한송이>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등 열댓 편 나오고, 국악은 <서편제> 등 잘 된 거만 얘기해서 그런데 나머지는 다 안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87년 <국악음반 1집 '김수철'>에서 89년 <원 맨 밴드>까지의 힘들었던 시절을 솔직히 들려줬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간간이 감정이 격해져 "목이 멘다"고 했다.

"87년 <국악 김수철>이란 작곡집을 냈는데 정확히는 575장 나갔다니까요. 1주일 뒤에 레코드회사 부장님이 전화가 와요, 폐품처리하겠다고. 그 당시는 LP를 녹여서 다른 판을 또 찍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제가 상처받았어요."

1억 가까이 되는 빚을 졌다. 고민했다. 걸어오던 길을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받는 대중적인 음악 만들어 빚을 갚을 것인가. 고민 끝에 "그냥 내 길을 가야지, 결심하고, 기왕 왕창 빚진 김에 더 지자 해서 <원 맨 밴드>를 한 거예요. <원 맨 밴드>는 돈이 안 들어갈 거 같은데, 돈이 더 들어. 드럼 쳤다가 또 그거 듣고 베이스 치고, 또 그거 듣고 기타 치고, 뭐 치고 뭐 치고…. 녹음실을 너무 많이 써야 돼. 노래하고 믹싱하고 다 하려니까, 어이구 목이 메네."

정신없이 보건체조했는데, '정신 차려'가 떴네

"대중의 귀는 정확해요."
"대중의 귀는 정확해요." ⓒ (주)리메인
선곡도 '내 길'대로 했다. '언제나 타인' '정신차려' 등을 수록했다. 처음 시장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 때 MBC TV의 <화요일에 만나요> 피디가 생방송 출연을 요청하면서 "빠른 템포로 신나는 것 하나를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그래 '정신차려'를 부르기로 했다.

"'정신차려'가 좀 길어요. 그게 일절하고 이절하고 반나절이 또 있어. 또 제가 춤을 못 추잖아요. 그래서 제가 뭐 했냐면 어렸을 때 자장면집 들어가면 앞에서 (절하며 손님 맞는 동작을 보여주며) '어서옵쇼' 했잖아요. 또 중학교 때 보건체조 있죠, 그걸 한 거예요. 전주가 나오면 할 게 없으니까 한번 했다가 움직이라니까 또 걸어요. 무대가 막히면 다시 돌아서 걸어요. 할 게 없으니까 보건체조 한번 해주고. 그렇게 하고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게 터졌다. 여기저기 방송에서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 왔다갔다 한 그것을 해달라"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방송 녹화한 것을 거꾸로 복기하며 동작을 정리했고, 그 덕에 '정신차려'가 히트를 쳤다. 1억의 빚도 깨끗이 갚았다.

- 대중에게 타협하는 음악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지?
"지금도 확신하고 있는 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했어요. 대중은 알 수 없어요, 누구든지. 그거 알면 천재야. 그래서 스필버그는 천재야. 자기 하는 일 열심히 하다 보면 대중이 따라와주는 거죠. 그래서 저는 운이 좋다는 거예요. 저는 대중을 겨냥해서 한 작품이 하나도 없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거에 최선을 다해서 한 거지."

- 그렇다면 대중을 원망한 적은 없는지?
"없죠. (자신의 음악을 이해 못 해준다고 원망한 적은?) 그건 내 잘못이야. 그건 음악적인 완성도가 낮거나 대중성이 없거나 모호한 거지, 그걸 대중 탓하면 안 돼요. 대중의 귀는 정확해요. 국악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소리가 왜 대중화가 안 되냐, 생활화가 안 되냐, 이런 것 있잖아요. 그건 뭔가 들을만한 게 없다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의 천재성은 어디서 오는가

중학교 2학년 때 TV에서 기타 치는 장면을 보고 기타 연주법을 터득한 것, 국민응원곡인 '젊은 그대'를 단 3분 30초 만에, 송골매의 히트곡 '모두 다 사랑하리'를 30분 만에 작곡한 것을 두고 그의 천재성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 역시 99%의 땀이 밴 결과다. 그 자신이 들려준 <서편제> 작곡 때의 일화.

"영감은 아무 때나 오나, 내가 무슨…. 히트곡은 압축해서 나오는 거지, 실패한 것도 많고. <서편제>도 한계에 부딪혀서 5개월 동안 한 곡도 못썼어요. 아 정악, 대금이다 그거 하나만 캐치하고 아무것도 못 썼어요. 녹음실을 대금 선생님만 초청해놓고 빈 악보지를 갖고 갔어요. 그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어요. 밖에는 연주진 쭉 계시고 피아노방 들어가서 한번 호흡 가다듬고 확 25분 만에 쓴 게 '천년학'이에요. 그때 고민한 5개월의 시간은…. 굉장히 힘들었죠."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타를 잡는다.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타를 잡는다. ⓒ (주)리메인
다른 사람의 노래 중 그의 애창곡은 <나 하나만의 사랑>과 김현식의 <겨울바다>. 요즘 후배들의 노래도 듣는지 물었다.

"제가 일부러 듣지는 못해요. 차 이동시에 FM에서 듣곤 하죠. 드렁큰 타이거 JK, 바비킴 노래 좋구요. 또 윤미래 그 친구도 좋아하고. 또 뭐 있지, 무지하게 많은데. 요즘 후배들 노래 잘하잖아요. 오버하는 것도 재밌고."

밴드 공연을 직접 보기 위해 가끔 홍대 앞 클럽에도 나가본다. "키가 작아서 뒤로 막 밀리고 그래서 그렇지, 아, 애들 재밌어요." 다만 여자 가수들의 야한(?) 무대의상을 볼 때는 세대차이를 느낀다. "거기서 내가 늙은 티가 나더라고. 다른 얘기는 다 재밌는데, 여자 복장은 좀 야한 거 같더라구. 집에서 입어야 되는 옷을 입고 나오니까 어려워서 눈을 못 마주치겠더라구요."

- 후배들과 공동 앨범을 출반할 계획은 없는지?
"내면 다 망하는데…. 사실 아이디어는 오래됐는데 음반시장 사정이 너무 어렵잖아요. 안 팔리는 거 각오하고 해야 하는데 내가 돈이 없잖우. 선배가 돼 가지고 그냥 못 부른다고. 오면 밥이라도 먹이고, 기본적인 걸 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상황이 너무 어려워요."

늙은 그대도, 잠 깨어오라

10년 전 그는 술과 담배를 끊었다. 음악 작업하는 데 체력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다. 골프도 못 한다. 다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잠깐이라도 기타를 잡는다. "안 그러면 굳어요, 굳어." 집에 있는 기타는 10여대. 작은거인 시절의 기타도 보관하고 있다. "저는 배고파도 악기는 안 팔아요. 저의 흔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그의 최대 관심사는 이번 콘서트. "솔로로 첫 단독 콘서트이고, 그동안 저를 사랑해주신 여러분께 일부분이라도 보답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공연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여러 매체의 인터뷰 요청도 마다하고 기자간담회로 대체했다.

"제가요, 작년에도 공연은 20~30회 했거든요. 다 7080 공연이야. 이 사람들이 다 외로운 거야. 분위기만 조성하면 이 사람들이 다 따라 불러요. 그만큼 외로운 거야. 우리 세대가 잘 놀지 못한다고요. 데모에 치고, 뭐고 해서 놀 줄을 몰라. 7080세대가 약간 불쌍한 사람들이죠."

내달 13일, 외로움을 느끼는 7080세대라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찾아 그 외로움을 함께 달래보는 것은 어떨까. 지역 관객들도 아쉬워할 것은 없다. 이후 전국 순회공연도 계획하고 있다.
#김수철#작은거인#서편제#국악#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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