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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에 30만불의 장학금을 남긴 고 황춘영씨 생전 모습
모교에 30만불의 장학금을 남긴 고 황춘영씨 생전 모습 ⓒ 군산중고 동문 장학재단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던가.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자신이 자랐던 고향과 배움을 닦았던 모교에 대한 그리움이 어떨까.

전북 군산시 나포면 주곡리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던 고(故) 황춘영(2003년 위암 사망·군산고 34회 졸업생)씨도 그랬다.

8남매 가운데 장남이었던 황씨는 어려운 농촌살림 탓에 스스로 가정교사를 하면서 고교를 마쳤으나,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일곱 동생들을 거느린 채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래도 생활고를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서른두 살이 되던 해에 혈혈단신 미국행을 택했다. 가난을 못 이겨 미국으로 건너갔던 그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 식당 아르바이트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도미 2년 후에는 어머니와 남동생 3명까지 미국으로 불러들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서 모은 돈으로 휴스턴 근교에서 모텔을 시작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다시 LA근교에서 일식집을 열어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다 82년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황씨는 평소 고향과 모교, 어렵게 공부하던 어린 시절 등을 떠올리면서 "가난 때문에 못 배우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말을 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다.

이렇게 혼자 몸으로 건너갔던 타국 땅 미국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아들 둘을 둬 다복한 가정을 이뤘던 황씨에게 2000년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생겼다. 위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투병생활을 하던 그는 2002년 11월 변호사를 불러 모교인 군산고등학교에 장학금으로 30만 달러(당시 금액으로 약 3억7000만원 상당)를 전달해달라는 유서를 작성했다. 부인에게는 가게를, 아들 둘에게는 각각 10만 달러씩만 남겼다.

그리고 이듬해 3월 23일 60세의 나이로 황씨는 고단한 이생의 삶을 마쳤다. 황씨가 남긴 장학금 30만 달러는 미국 법원과 정부의 허가를 거쳐 마침내 지난 15일 군산중·고 장학재단에 도착했다.

군산중·고 장학재단 문정일(63·36회) 이사는 "미국에서 30년을 살았던 황 선배의 마음에 3년여 만에 후배들에게 전달됐다"면서 "이자 수입만으로도 매년 10명의 후배들에게 연간 수험료 전액을 '황춘영 장학금'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던 황춘영씨는 이렇게 후배들의 가슴에 영원한 별이 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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