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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흠과 모가두가 좌등의 거처를 나온 것은 들어간 지 거의 반시진이 지나서였다. 진운청 역시 배웅을 위하여 잠깐 모습을 보이더니 나온 데가 아닌 다른 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같은 전각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들어간 것일 게다.

진번(辰幡)과 이번(離幡)은 너무나 오랜 기다림에 지칠 지경이었다. 그 기다림 끝에 이제 움직일 시기였다. 서두르면 안 된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허나 너무 오래 기다렸던 탓일까? 그들은 더 기다리지 못했다. 더구나 그들이 나온 전각의 문도 완전히 닫히지 않았고, 창문들 역시 후덥지근한 날씨 탓인지 활짝 열려있어 잠입하기 좋은 기회였다.

어둠 속에서 타인의 이목을 숨기고 좌등의 거처로 다가가는 일은 그들에게 있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더구나 이미 축시 말이라 움직이는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

일이 너무나 쉽게 풀리고 있었다. 살짝 들여다본 안에는 뜻밖에도 좌등이 보였다. 아직 침상에 들어 잠을 청하는 것이 아니었다.

'운기(運氣) 중인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좌등의 모습은 분명 운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기야 내일 결전을 앞두고 그냥 잠을 청한다는 것은 바보나 할 짓이다. 무림인에게 있어 운기란 평상시에도 반드시 해야 하는 법이니 당연한 수순일 터였다.

그들에게 있어 이것은 너무 좋은 기회였다. 잠이 든 것보다 더 완벽한 기회였다. 무림인에게 있어 운기 중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라 할 만큼 아주 비겁한 짓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무림의 암묵적 규칙을 따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무림인이라기보다 국사(國事)를 위해 일하는 관리라고 생각했고, 대의를 위해서는 이런 작자 따위는 어떻게 죽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

진번이 이번을 보며 눈짓을 했다. 오랜 기간동안 손발을 맞춰온 두 사람 간에는 눈짓 하나만으로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고, 그것은 자신 혼자서 적당히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허나 이번이 고개를 저었다. 둘이 같이 하자는 뜻이었다. 공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닌 완벽을 기하자는 뜻일 것이다.

진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이 벽을 타고 옆 창문으로 이동했다. 공격 방향과 움직임을 원활히 하고자 함이었다. 진번으로는 이제 완연히 등을 보이고 있는 좌등의 등짝에 벽력장(霹靂掌)이 작렬시키면 끝날 터였다. 설사 정통으로 맞지 않아 즉사를 피한다 해도 이번의 화령지(火靈指)는 좌등의 대혈에 공기가 드나들도록 만들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허공에서 마주쳤다. 진번의 고개가 한 번 끄덕이자 곧 이어 이번이 고개가 끄덕였다. 그리고 세 번째 그들의 고개가 함께 끄떡여지는 순간 그들의 몸은 이미 창문 안으로 빠르게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우르릉--- 파지직---!

진번의 쌍수가 허공을 가르자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번개 불과 같은 빛살이 좌등의 등을 향해 쏘아가고, 좌측에서 이번의 손가락이 튕겨지자 화르륵 불꽃이 피어오르며 몇 줄기 불줄기가 좌등의 목과 옆구리를 향해 쏘아갔다.

등을 보이며 운기를 하는 듯 보였던 좌등으로서는 멀쩡히 있어도 막기 힘든 매우 위력적이고 완벽한 기습이어서 반드시 피를 토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스르르륵---

헌데 이게 웬일인가? 그들의 공격이 성공하는 듯 보이는 순간 좌등은 가부좌를 튼 상태로 그대로 누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정말 진번과 이번의 공격을 피하는데 있어 가장 적절한 행동으로 보였다. 마치 뒤에 눈이 달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구나 자신의 등짝을 향해 돌진해 오던 진번의 눈앞에 갑자기 금빛 휘황찬란하고 예리한 물체가 동공을 파고들자 급히 신형을 멈추려 했지만 무언가 이미 뻗은 오른손의 장심을 뚫고 들어와 손을 온통 헤집어 걸레처럼 만들고는 자신의 목 줄기를 그어버렸다.

슈우-- 슉슉슈우---

그 뿐이랴! 그 금빛 병기는 화들짝 놀라 신형을 옆으로 튕기는 진번에 이어 좌측으로 다가들던 이번의 팔목을 때리더니 허벅지를 관통해 버리는 것이다. 마치 금사(金蛇)처럼 유연하게 보이는 물체에 두 사람은 지금 일어난 상황을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급히 좌등의 공격권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무적신창(無敵神槍)이라더니… 저것이 바로 그것이었던가?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그들의 뇌리에는 아직도 지금 일어났던 상황의 잔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그들이 기습하는 순간 좌등은 벌렁 누워버렸고, 그의 몸 대신 불쑥 금빛 창이 나타나더니 그 창이 순식간에 일곱 개로 늘어나는 것 같은 환영을 보는 순간 두 사람 모두 이 지경을 당했던 것이다. 너무나 오래 기다렸던 탓에 조급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그리고 좌등이 운기하고있다는 안도감에 너무 쉽게 생각했던 탓도 있었다. 허나 그들도 그저 일류 고수입네 하는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이 아니었고, 그들의 기습이 실패한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제법들 인걸?"

들어 누웠던 좌등이 양발을 허공에 엇갈려 그 탄력으로 몸을 세우더니 다소 실망했다는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미 기습할 줄 알았고, 상대의 위치도 파악했다. 그에 따라 치명적인 한 수를 준비해 두었는데 상대에게 가한 타격이 썩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운공 중이 아니었군."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웬만한 인물들 같았으면 좌등의 창은 이번 단 일수에 그들의 심장을 관통했을 터였다.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번의 목소리였다. 팔목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에 손을 번갈아 움직여 주무르면서 창에 찔린 안쪽허벅지의 부상 정도를 가늠하고 있었다.

"호오… 세 시진이나 기다린 사람들에게 너무 실망을 안겨준 건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창을 꼬나 쥐는 좌등의 모습은 덩치도 그러했지만 마치 전장에 선 대장군의 위엄이 엿보였다. 듣기는 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위축감을 느끼게 하는 좌등의 기도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사천왕(四天王) 중 하나처럼 보였다.

'함정이다!'

갑자기 하나의 불길한 생각이 진번의 뇌리를 스쳤다. 이미 오른 손은 창날이 장심을 관통하고 빠져나갔기 때문에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주요 근육이 잘려져 영원히 사용하기 힘들 터였다. 지혈은 급히 했지만 아직도 바닥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목 줄기의 상처가 그리 깊지 않다는 점이었다. 목을 타고 가슴에 흘러내리는 뜨듯한 액체가 무언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게 향했다. 이번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미 눈빛만으로 서로의 생각을 읽었고, 같다고 느낀 후에 취할 행동은 오직 하나였다.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이번보다 먼저 진번이 들어온 창문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 소름끼치는 파공음이 머리위에서 내리 꽂혔다.

쇄애액---!

진번은 튕기듯 옆으로 돌았다. 누군가 천정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그보다 먼저 그의 손에 들린 검은 허공을 가르자마자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따라 붙었다. 뒤늦게 신형을 날리려던 이번의 눈에 진운청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리 이곳에서 소리가 났다고 하나, 그리고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고 해도 진운청이 이토록 빠르게 올 수는 없다. 달려왔더라도 사태 파악하기도 촉박한 순간이었을 텐데 공격이라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빌어먹을… 함정이었어."

이번이 뒤늦게 몸을 날리려다 멈추며 나직하게 부르짖었는데 이미 좌등의 무시무시한 금빛 신창이 자신의 전신 대혈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그는 빠르게 옆으로 돌았다. 비록 허벅지를 찔려 완벽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창의 묘용을 알고 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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