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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토지>의 배경인 경남 하동 평사리에 있는 한 초가의 모습
박경리 <토지>의 배경인 경남 하동 평사리에 있는 한 초가의 모습 ⓒ 서종규
허구에 지나지 않은 소설의 배경이 현실 속에 그대로 재현되어 관광 명소가 된 경남 하동 평사리는 비가 오는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한국문학의 위대한 역사소설의 힘이었을까? 아님 <토지>가 세 번이나 텔레비전 드라마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덕택일까? 평사리는 허구 속의 현실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박경리 소설가가 1969년 6월(43세)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 8월(68세), 25년 만에 5부로 완성한 대하소설 <토지(土地)>. 이 소설의 배경인 평사리는 칠성이집, 오서방집, 우가집, 김평산네, 김훈장네, 야무네집, 정한조집, 서서방네, 영팔이 판술네, 막달네, 김이평집 두만네, 용이네, 그리고 최참판네 등 허구의 인물들이 살았던 집들이 모두 현실이 되어 있다.

현실 공간으로 자리잡은 평사리

허구에 지나지 않은 소설의 배경이 현실 속에 그대로 재현되어 관광명소가 된 경남 하동 평사리에 있는 물레방아
허구에 지나지 않은 소설의 배경이 현실 속에 그대로 재현되어 관광명소가 된 경남 하동 평사리에 있는 물레방아 ⓒ 서종규
문학 속 배경이 그대로 현실이 된 곳은 이곳만은 아니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강원도 평창에 '이효석 문학관'이 크게 성공하자, <소나기>의 배경인 경기도 양평엔 '양평 소나기 마을'을 조성 중이고, 경북 청송엔 김주영의 <객주>를 배경으로 한 '객주 문학테마타운'이 조성되고 있다. 또 <태백산맥>의 배경인 전남 보성 벌교엔 '태백산맥 문학관'이 조성되고 있다.

12일(토) 오전 8시, 산을 좋아하는 '풀꽃산행'팀 7명은 하동 평사리 뒷산인 '성제봉'에 오르기 위하여 광주를 출발하였다.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성제봉'은 암릉과 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철쭉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철쭉의 계절에 전국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많은 산이다.

비가 내려 그 넓고 아름답다는 악양들과 섬진강마저 희미하게 구름 속에 숨어 있다.
비가 내려 그 넓고 아름답다는 악양들과 섬진강마저 희미하게 구름 속에 숨어 있다. ⓒ 서종규
오전10시 평사리 한산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쏟아지는 비가 앞길을 막았고, 그 넓고 아름답다는 악양들과 섬진강마저 희미하게 구름 속에 숨어 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바위들이 많은 산을 등산하는 무리를 감수할 것인가 망설이다가 우리들은 등산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고 평사리 마을 관광에 들어간 것이다.

이 <토지>의 배경인 하동 평사리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힘입어 널리 알려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2여 년 전 이 평사리를 처음 찾았을 때 입구에는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었다.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타고 오르는 포도나무에서 신 포도들이 익어가고 있었고, 마을 샘이며 들로 나가는 길이며, 마을 옆에 다랑이논들이 전형적인 시골 마을을 드러내 소설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 때, 마을 사람들에게 최참판댁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그런 사람 살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당황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마을 위까지 올라가 가장 복판에 자리 잡은 다랑이밭을 보면서 이 밭 근처가 최참판댁이려니 하는 짐작을 하면서 허구의 세계를 현실에서 찾는 자신들이 웃기게 보이기도 하였다.

별당채, 안채, 중문채, 뒷채, 사당, 초당, 행랑채, 그리고 이곳 사랑채 등 최참판댁은 전통 양반 가옥의 전형을 따라 지어졌다.
별당채, 안채, 중문채, 뒷채, 사당, 초당, 행랑채, 그리고 이곳 사랑채 등 최참판댁은 전통 양반 가옥의 전형을 따라 지어졌다. ⓒ 서종규
최참판댁이려니 하고 다랑이밭에 서서 내려다 본 악양들의 모습은 신비에 가까웠다. 토지를 읽고 느꼈던 배경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넓은 악양들은 반듯하게 경지 정리가 되어 있어서 풍요로운 벌판의 느낌이 풍겨왔으며, 그 옆을 흐르는 섬진강의 유려한 물빛은 허구 속의 배경이 그대로 현실화된 느낌이었다.

그 뒤 매년 이 곳을 방문하였는데, 몇 년 뒤에 다랑이밭에 서서 악양들을 바라다본 그 자리에 최참판댁이 지어진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동군에서 그곳을 사들여 최참판댁을 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찾아간 그 곳엔 최참판댁 공사가 한창이었고, 그 다음해부터는 최참판댁이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이듬해에는 좁은 길을 넓히는 공사가 진행되었고, 최근에는 마을 대부분을 초가로 바꾸는 텔레비전 드라마 세트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결국 <토지>의 배경인 평사리의 최참판댁 등 일부는 하동군에서 짓고, 주변 인물들이 사는 공간 일부는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짓고, 그렇게 꾸며진 허구의 공간이 된 것이다.

꾸며진 평사리 마을 사람들의 집에는 소도 기르고, 개도 기르고, 닭도 기르고 있었다.
꾸며진 평사리 마을 사람들의 집에는 소도 기르고, 개도 기르고, 닭도 기르고 있었다. ⓒ 서종규
주차장에서 올라가면 많은 가게들을 지나 물레방아간이 나온다. 물레방아간에서 용이네, 칠성이네, 김평산네, 김훈장네 등 마을 사람들의 초가집이 나온다. 마을 사람들의 집에는 소도 기르고, 개도 기르고, 닭도 기르고 있었다. 양반이 아닌 평민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려고 만들어진 공간이다.

마을 사람들의 집을 돌아 위로 올라가면 최참판댁이 나온다. 별당채, 안채, 중문채, 뒷채, 사당, 초당, 행랑채, 그리고 사랑채 등 최참판댁은 전통 양반 가옥의 전형을 따라 지어졌다. 그리고 그 위에 '토지 문학관'으로 명명하고 싶었으나 작가에 의하여 거부된 '평사리 문학관'이 있다.

북적이는 관광지, 그러나 아쉬움 남아

마을 사람들의 집을 돌아 위로 올라가면 최참판댁이 나온다.
마을 사람들의 집을 돌아 위로 올라가면 최참판댁이 나온다. ⓒ 서종규
비가 오는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문화해설사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비가 오는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문화해설사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 서종규
사랑채에 갔을 때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꼭 마네킹 같이 생긴 사람이 사랑채에 앉아 있었다. 바로 살아있는 최참판이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지금 찍고 있는 KBS 드라마 <헬로 애기씨>의 등장인물인 줄 알고 배우냐고 물었다. 배우가 아니고 명예 최참판이란다.

하동군에서 이곳 최참판댁 사랑채에 마네킹을 앉혀 놓은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 있는 명예 최참판을 앉혀 놓은 것이다. 하동군에서 2006년 5월부터 관광객을 위하여 명예 최참판을 위촉하였고, 현재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이곳 최참판댁 사랑채에서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명예 최참판뿐만 아니라 문화해설사를 배치하여 단체 관광객들에게 설명하고 있기도 하였다.

최참판댁 사랑채에는 꼭 마네킹 같이 생긴 사람이 사랑채에 앉아 있었다. 바로 살아있는 최참판이다.
최참판댁 사랑채에는 꼭 마네킹 같이 생긴 사람이 사랑채에 앉아 있었다. 바로 살아있는 최참판이다. ⓒ 서종규
주말의 명예 최참판으로 활동 중인 김동언(52)는 살아있는 사람이 직접 최참판이 되어 최참판의 책을 읽는 모습이나 차를 마시는 등 생활 모습을 실제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더 친근감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끔은 관람객들과 차를 마시며 마을에 대한 설명을 하여 주기도 한단다.

"책을 읽고 있으면 재미있는 일도 있었어요. 관람객들 중 어떤 사람은 움직이는 마네킹인 줄 알고 '사람인지 아닌지' 내기도 합니다. '사람이오'라고 대답하면 깜짝 놀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인형을 세워 놓은 경우가 많은데 직접 사람이 않아 있으니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하동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명예 최참판 제도는 좋은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관광객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마음이 문화사업의 출발이 아닌가 싶어요. 한 편의 소설이 이렇게 큰 문화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지자체들이 더 많은 계발과 계획적인 투자를 했으면 좋겠어요."

명예 최참판은 가끔 관람객들과 차를 마시며 마을에 대한 설명을 하여 주기도 한단다.
명예 최참판은 가끔 관람객들과 차를 마시며 마을에 대한 설명을 하여 주기도 한단다. ⓒ 서종규
얼마 전부터 마을 입구에 입장료도 받는다고 말하였더니 쓴웃음을 웃으며 "군에서 충분한 뒷받침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죠. 아직 초가집들 몇 채에 새 지붕을 입히지도 못하였거든요"라며 마을 관리 등 하동군의 지원 사업으로는 부족하다고 털어 놓는다.

현재 평사리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수십 대의 승용차와 버스들로 북적이는 관광지가 되었다. 올라가는 길을 따라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가게가 들어서면서 동네 분위기도 흥청거리는 시장처럼 바뀌었다.

<토지>의 배경인 평사리 마을의 원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문학공원으로 조성하였다면 현재의 모습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군에서 충분한 뒷받침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죠. 아직 초가집들 몇 채에 새 지붕을 입히지도 못하였거든요"
"군에서 충분한 뒷받침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죠. 아직 초가집들 몇 채에 새 지붕을 입히지도 못하였거든요" ⓒ 서종규

#하동#평사리#토지#박경리#최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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