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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yes24
한국 현대사 속에서 여성이 지닌 위치는 어떠한가?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은 스스로의 제 위치를 드러낼 수 없었다. 오직 침묵 속에서 온갖 일을 도맡아 처리해야 했다. 한 남자만을 위해 평생 매여 살아야 했다. 물론 좀 더 개화된 시대 속에서 제 인생을 산 여성들도 없지만은 않다.

김서령이 쓴 <여자전>은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헤쳐 온 여덟 명의 여성에 관한 인생 이야기다. 잡지 <샘이 깊은 물>에서 인물 인터뷰를 시작해 <신동아> <월간중앙> 등에 인물칼럼을 쓰고 있는 저자의 내공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여덟 분은 한국 현대사의 곡절을 뚫고 나가면서 제 삶의 진액으로 금강석 같은 이야기를 만드신 분들이다. 그걸 세상에다 찬란하게 뿌려주신 분들이다. 역사의 혼탁한 파도 위로 어리고 죄 없는 여자의 몸이 무방비로 둥실 떠밀렸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갈라지고 부스러지고 삭고 썩고 뒤틀렸지만, 결국 야물게 제 상처를 아물린 분들이다."(머리말)

여기에는 우선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살게 된 '고계연' 할머니가 있다. 지금 일흔이 넘은 할머니는 경상남도 삼천포의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났다. 전쟁이 터져 열아홉 살 무렵에 아버지와 오빠를 찾기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사상도 모른 채 빨치산에 가담하게 됐다.

그 속에서 그녀는 여맹(조선민주여성동맹)의 공문서를 작성하고 각종 문건들을 정리하며 보관하는 일을 도맡았다. 종종 보급투쟁에도 나갔는데 그때마다 토벌대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집중 사격을 받으면서 이동하다 보면 스물이 열이 되고, 열이 다섯이 되는 수가 허다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살아남는 질긴 운명을 지녔다.

"내가 이사를 서른여덟 번을 했네요. 이집이 마흔 번째 집입니더. 인제 쪼매 안정이 되는 것 같네요. 환갑을 넘기고 나니 비로소 발자국이 제대로 떼지는 거 같네요."(37쪽)

그랬다. 빨치산이라는 이력 때문에 그녀는 자유를 얻은 이후에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늘 감시단에 쫓겨 다녀야만 했고, 뒷조사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물론 그 당시 감시단은 미행만 목적인 게 아니라, 돈을 뜯어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제는 70이 넘어 자유로운 세월을 살고 있다는 그녀. 그렇지만 불현듯 그 시절의 악몽이 떠오를 때면 낚싯대를 메고 바다를 찾아 떠난다고 한다. 몇 해 전에는 바이칼에도 갔고, 자메이카의 베이에서도 바다낚시를 했단다. 그 모두가 그 때의 아픔과 상처를 잊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외 이 책에는 반세기 넘게 홀로 가문을 지키며 북에 있는 남편을 50년째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김후웅 할머니, 중국의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할머니, 한 달의 인연을 영원으로 간직한 채 딸 아이 하나 낳아 홀로 길렀던 최옥분 할머니, 자칭 황진이보다 더 치열한 춤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쉰셋의 이선옥님도 있다.

실로 이 책에 기록된 여덟 명의 여성들은 그저 대한민국의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 공통 사안은 하나도 없다. 출신지가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부와 환경이 다 다른 여성들이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가냘픈 듯 보이지만 강인하고, 애처로운 듯하지만 뭔가 지독할 정도로 뚝심있게 살아왔다. 식민지와 전쟁, 좌우 대립과 가난, 독재와 가부장재의 이데올로기를 실체도 모른 채 온 몸으로 헤쳐 나왔다. 가히 그녀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다 풀어 놓으면 이 책 한권으로도 모자라지 않겠나 싶다.

여자전 - 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

김서령 지음, 푸른역사(2017)


#김서령#여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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