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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숲
장욱진은 마치 시인 천상병을 연상시키는 화가입니다. 오직 그림에만 몰두하고서 행복한 삶을 살다 '소풍 끝내는 날' 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에는 아이들이 그린 것 같은 순수함이 가득합니다. 가족을 그렸고, 집을 그렸고, 새와 동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정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치고, 거기엔 장욱진만의 질서가 있습니다. 아마도 마음껏 자유롭게 그리다 보면 터득하게 되는 질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참새를 네 마리 줄지어 날게 한다든지, 얼굴을 자주 거꾸로 그린다든지, 집과 가족을 많이 등장시킨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는 그저 자유로우면서도 추상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고 아이스러움으로 남아, 끝까지 형상의 외관을 놓지 않으면서도 내면의 심기를 표현하는 것 이것이 장욱진 그림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화가는 쪼그려 앉아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방바닥에 화폭을 놓고 그리면 주변 경치가 이어지는 듯해 큰 그림을 그리는 기분이 난다"고 했습니다. 폼 나게 이젤에 캔버스를 놓고 그리는 것만 생각하는 저로서는 특이했죠. 우리는 자주 '정석(定石)'이라고 여기는 것에 익숙해져서 당연시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자세가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평생 '3무(無)'로 사신 고 차범석의 삶도 생각났습니다. 핸드폰, 신용카드, 자동차 없이 사는 것을 이 스피드 시대에 굳게 지키시고 가셨습니다. 그건 남이 보면 고립이지만 본인 자신에게는 자유였을 것입니다.

가끔 여행지가 문화 행사로 법석이는 것이 안 좋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 지방으로서는 사활이 걸리는 행사이겠지만요. 장욱진 화가는 수안보에 화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변이 온천지대로 개발되는 바람에 1985년에 용인의 해묵은 농촌집으로 화실을 옮겼습니다. 이럴 줄 아는 것이 진짜 자유이겠지요.

이번에 제가 소개하는 책도 어린이를 위한 책입니다. '어린이 미술관'이라는 타이틀로 우리나라의 유명한 화가의 일대기를 풍부한 그림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 책입니다. 저는 예전에 '박수근'을 보았고 이번에 '장욱진'을 보았습니다. 아이들 책답게 글은 소담스러울 정도로만 있고 그림이 풍부해서 좋습니다.

책 제목이 <새처럼 날고 싶은 화가 장욱진>입니다. 이 책의 지은이 김형국은 화가를 오랫동안 지켜본 지인이었습니다. 지극하게 산 이를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면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직접 보았다는 것은, 그의 작품을 알아볼 줄 아는 감미안도 있어야 하겠지만,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장욱진이 쪼그려 앉아 그리고, 자기 그림을 벽에 걸어놓기를 싫어하고, 정갈하게 화실을 꾸미고, 낙망할 때에는 한참을 술에 빠져 생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이런 책을 쓸 자격이 있겠지요. '새처럼 날고 싶은 화가'는 그런 지은이가 붙인 별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장욱진 화가는 자주 "나는 심플하다"고 했답니다.

"단순한 그림은 특히 어린이들이 좋아합니다. 자기들이 그린 그림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른들도 좋아합니다. 복잡한 세상을 사는 어른들은 단순한 예술을 보면 마음이 누그러지고, 느긋해지고, 신선해지기 때문입니다."

▲ '가족도'/1972년/캔버스에 유화
ⓒ 장욱진
장욱진 화가는 가족을 자주 그렸습니다. 그림 속에 있는 아이 그림을 보고 화가의 자제들이 서로 자기라고 우기곤 했으니까요. 화가는 이런 대화에 미소로만 답했습니다. 아마 이 그림 저 그림에 다 자기 자녀들을 '집어' 넣었겠지요.

▲ '진진묘'/1970년/캔버스에 유화
ⓒ 장욱진
아내를 모티브로 그린 그림 '진진묘'라는 그림은 끼니도 거른 채 일주일 꼬박 걸려 그린 '대작'입니다. "관세음보살 같은 내조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그림에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자유로운 예술가에겐 가족의 힘이 무엇보다 절실한 요소입니다.

생활비나 화실 마련을 위해 가족들이 애썼습니다. 화가는 '핑계'를 댑니다. "(나는)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

지금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동양서림'이라는 서점은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원래 화가의 아내가 운영하던 서점이었답니다. 다른 서점은 다 없어졌는데 유독 대학로에서 살아남아 있는 서점입니다.

몇 년 전까지 있었던 샘터사 사옥의 서점도, 그 뒤의 '정신세계사' 책방도 대학로를 살찌우게 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다 없어지고 연극 포스터만 길거리를 장식합니다. 이런 점에서 대학로는 더는 대학로가 아닙니다.

화가는 집도 자주 그렸습니다. 집은 어떤 곳일까요. 화가는 화실에 따로 거주하면서도 집을 그릴 때 자주 가족을 그렸습니다. 화가에게 집은 상상 속에서 더욱 큰집이 됩니다. 쉼터가 되고 거처가 되고 배경이 됩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 2006년 12월호에 장욱진 화가의 그림과 가족과 집에 대한 기사가 있습니다. 몇 달 전에 보았더랬지요. 꼭 구해서 일독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종로 도서관 가니 요즈음엔 잡지 과월호도 대출이 되더군요.

"그이는 '이 공간이 곧 내 화폭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 집에 못 하나 못 박아요. 자기의 화폭이라는데…."(부인 이순경 여사)
"아버지는 주위 분들더러 '나를 화가(畵家)로 불러달라. 교수나 화백이란 호칭도 싫다'라며 꼭 집 가(家)를 붙여서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장녀 장경수 님)


경기도 용인에 있는 화가의 말년의 화실(고택)은 지금 갤러리로 운영 보존되고 있습니다. 네이버에서 '장욱진 미술문화재단'을 검색해 보시면 이곳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가족이 운영하는 재단이자 갤러리이자 사이트입니다. 회원가입도 하시고 120여 점이나 되는 소장품도 구경하십시오. 저도 언젠가는 이곳 갤러리, 아니 화가의 집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 '집과 아이'/1959년/캔버스에 유화
ⓒ 장욱진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에 대한 몽상을 많이 묘사했습니다. 물론 그 집은 다락방과 지하실이 있는 전형적인 프랑스 가정의 집이지만, 몽상 속의 집 특히 자신이 태어나거나 살고 싶은 집은 어떤 형태의 집이든 현실에는 없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상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집입니다.

"집은 몽상을 지켜주고, 집은 몽상하는 이를 보호해주고, 집은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롭게 꿈꾸게 해준다",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 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는 것을 우리는 드러내어야 한다. 이 통합에 있어서 연결의 원리는 몽상이다."(책 <공간의 시학> 중)

한번은 그런 바슐라르의 몽상을 우리나라 한옥에도 적용할 수 없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의 형상과 기억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좋은 기억으로만 갈무리되어 머릿속에 남곤 합니다. 어렸을 때의 것은 뭐든지 좋은 것으로 기억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장욱진의 그림 속 집도 유년의 집, 궁핍했을 때 가지고 싶었던 집, 안온히 거주하고 싶은 집,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거주하는 그런 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 옆에는 개와 소 같은 가축과 새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집 주위에 있을 뿐입니다. 화가 생각에 그건 아마 당연할 것입니다. 동물들은 자기 거처를 벗어나 돌아다니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일 테니까요.

▲ '하얀 집'/1965년/캔버스에 유화
ⓒ 장욱진
해와 달을 한 화폭에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에 '풍경 그림을 그릴 때 붉은 해를 그리면 좋은 점수 못 받는다'라고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대낮의 해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랬을까요?

그런데 화가의 그림에는 그 '붉은 해'가 마음껏 등장합니다. 작게 그려서 도드라지지는 않는 얌전한 해입니다. 아하! 그러고 보니 그저께 저도 그런 해를 보았습니다. 노을이 질 때의, 자꾸만 보아도 되는 붉은 해 말입니다.

해와 달이 같이 있다는 것은 사실 '자연스런' 것입니다. 강한 햇빛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가끔 해가 기력이 쇠하고(?), 마침 달이 우리 위를 지날 때 낮 달을 볼 수 있는 것처럼요. 고정관념은 이렇게 예술가들이 앞서서 깨뜨립니다.

▲ '가족'/1978년/동판*세리그래프
ⓒ 장욱진
화가는 자신을 '까치를 잘 그리는'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장욱진만의 까치입니다. 까치같이 생기지 않았거든요. 홀로 그려진 새는 전부 까치인 것 같습니다. 참새는 꼭 네 마리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적은 숫자 중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넷이라고 말했습니다. 넷은 일정 간격으로(....) 나란히 놓을 수 있고, 하나와 셋(. ...), 셋과 하나(... .), 둘둘(.. ..)로 배열해서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책이지만, 이전에 박수근의 같은 시리즈가 그렇듯이, 화가의 그림이 풍성하게 들어 있어 그림책을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어른이라면 소장할(?) 가치가 있습니다. 아니 자녀나 조카와 같이 보려는 이중의 목적(!)으로 선택할 만한 책입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그렇게 하고 말았습니다.

기사를 위해 운 좋게도 맏딸 장경수씨와 잠시 통화를 했습니다. 지금 대구에서 전시회가 있다고 하네요. 하단 '덧붙이는 글' 난에 자세하게 적어놓았습니다.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용인의 갤러리에 판화 10점을 걸어놓겠다고 하시네요. 평소에는 갤러리에 가셔도 화가의 작품을 책으로밖에 볼 수 없답니다. 찻집이 있고요. 그러나 화가의 생전의 작업실 고택을 개조한 곳이니 화실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쪼그려 앉아 그림을 그리셨느냐고 하니 그러셨다고 하십니다. 해와 달을 한 화폭에 그린 이유도 여쭈니, 우주 안에서는 다 같이 있는 것 아니냐 하십니다.

장욱진은 1990년까지 살았으니 현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후로 급속도로 변화된 세상은 아니 본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소란스런 곳을 피해 아이스런 그림을 그리다 새처럼 가버리셨습니다.

"나이는 먹어 쌓는 것이 아니라 뱉어야지."

덧붙이는 글 | 기사 중 그림은 장욱진 문화예술재단의 허락을 받고 실었습니다.

'동심의 시선-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화가' 장욱진展
일시 : 2007년 5월 1일 ~ 7월 1일
대구 수성아트피아 개관 기념展(053-666-3300)


장욱진 - 새처럼 날고 싶은 화가

김형국 지음, 나무숲(2003)


#장욱진#김형국#새처럼 날고 싶은 화가#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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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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