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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내는 참을성이 매우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현무각에서 충분히 떨어진 거리에서 좌등이 나오기를 벌써 한시진이 넘도록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함곡일행과 저녁을 같이 했다는 좌등이 거의 자시가 가까워지는 시각까지 머물고 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가끔 호탕한 웃음소리가 어둠 속 고요함을 뚫고 새어나오기도 했는데 굳이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엿들을 마음은 없었다. 은밀하게 나누는 대화라면 모를까 저리 떠들어 대는 것은 전혀 가치 없는 잡담에 불과할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과 비슷하게 현무각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무리들이 있는 터라 현무각 가까이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철기문의 인물들로 생각되는 칠팔 명의 인물들은 자신들보다 더욱 적극적이었고, 간혹 한두 명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내에게는 심심치 않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다 현무각에 부산한 움직임이 일며 문이 열린 시각은 자시 초였다. 불빛이 새어나오며 제일 먼저 진운청이 모습을 보였다. 이어 모가두가 나오더니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하는 좌등이 보였다.

이제 거처로 돌아갈 모양이었다. 헌데 좌등의 뒤를 이어 한 사내 역시 모습을 보였는데 그 사내가 모습을 보이자 철기문의 인물들로 보이는 자들이 있는 곳에서 약간의 움직임을 보인 것 같았다.

‘저 자식이 비영조 조장이라는 능효봉이란 놈인가?’

이미 운중보 내에 들어온 주요 인물들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진번(辰幡)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철기문에 두 놈이 혈간을 죽인 것으로 정보를 흘렸기 때문에 철기문의 인물들이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없애야 할 놈이지만 지금 그들의 목적은 좌등이었다.

그들은 다시 현무각으로 들어가지 않고 좌등 일행과 헤어져 다른 쪽으로 향하는 능효봉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이미 운중각 근처로 향하는 좌등일행이 꽤 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좌등 일행을 쫓는 일을 서둘 필요는 없었지만 어차피 능효봉이란 자는 철기문 인물들이 뒤쫓을 터였다.

두 사람은 아주 느긋하게 철기문의 인물들이 어둠 속에서 능효봉을 따라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들이 그곳을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거리를 두고 좌등일행을 뒤쫓았다. 급히 쫓아 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공격하기 가장 좋은 조건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거추장스런 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고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철기문의 인물들 뿐 아니라 그들 역시 현무각에서 비영조의 조장이었던 또 한 명이 빠져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좌등의 거처는 보주가 머무는 운중각에서 삼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낮은 담 하나를 두고 구분되어 있었다. 경각심을 일으킬 만한 병기 부닥치는 소리나 고함소리는 자칫 보주의 주의를 끌 수 있기 때문에 완벽한 기회를 잡아 되도록 빨리 끝내야 했다.

“............?”

좌등일행은 운중각 근처에 다다르자 잠시 무어라 하더니 좌등은 곧바로 운중각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모가두와 진운청이 좌등의 거처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 내일 광나한과의 숭무지례를 보고하러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 모가두란 자식은 왜 자신의 거처로 가지 않고 좌등의 거처로 가느냔 말이다.

‘더 지켜보아야겠군. 헌데 저 모가두란 자식 때문에 좀 귀찮을 것 같은데.....’

귀찮더라도 맡긴 임무는 완수해야 한다. 어차피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쳐다보며 시선을 교환하더니 엷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서로의 생각은 같았고, 그들은 느긋하게 편안한 자리를 잡고 나무등걸에 몸을 기댔다.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마음이야 급했지만 이미 따라붙고 있는 철기문의 인물들을 운중보 안에서 따돌릴 방법은 없었다. 물론 귀산노인이 가르쳐 준 비밀통로들을 알고 있었지만 운중보 전체에 모두 연결된 것이 아니어서 어차피 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반복해야 하는 만큼 굳이 비밀통로를 이용하려하다가 귀산노인이 그동안 지켜온 것을 탄로 낼 이유도 없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한 군데만 이용하면 철기보 인물들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고, 지금으로서는 그들과의 드잡이질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미 추태감이 자신들이 비영조 조장이었고, 혈간을 시해한 장본인이란 사실을 안 이상 철기보는 결코 자신들을 살려두려 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철기보의 인물들을 없애는 것이 차라리 현명한 선택이었다. 운중보 내에서만이라도 시시때때로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이 될 것이 뻔했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 믿고는 있지만 문제는 저들과 시간을 끌다가 혹시나 귀산노인이 불행한 일이라도 당한다면 큰일이었다.

그는 오히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인하고 있었다. 뒤따르는 철기문의 인물 중 조심해야 할 자는 구천각(九天閣)의 각주인 단혁이었다. 단혁은 혈간이 직접 어려서부터 가르친 인물인 만큼 결코 무시할 상대가 아니었다.

‘여덟 명....인가?’

함곡의 예상은 들어맞고 있었다. 철기문은 대놓고 현무각을 기습하거나 전력을 기울여 두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 했다. 옥청문 역시 한 문파를 이끌어가는 수장인 만큼 결코 추태감의 의도를 모를 리 없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단지 단혁과 그 수하들만 보낸 것을 보면 함곡의 예상대로 옥청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이제 곧 시작할 모양이군.’

운중각과 그 사방에 있는 사신각의 영역을 벗어났다. 운중보 외곽 쪽이었고, 뒤쫓는 자들의 기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일부는 미리 앞서 가 포위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걷는 방향을 틀수도 있었지만 이미 마음을 독하게 먹은지라 오히려 갑자기 빠르게 걸으면서 상대를 유인했다.

상대를 분산시키면서 선수를 치려는 것이다. 비스듬히 아래로 이어지는 길목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좌측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상대가 자리를 잡기 전에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이 공격은 상대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파팍---!

어느새 나무 위를 타고 오른 능효봉의 주먹이 자리를 잡으려던 사내의 턱을 올려치면서 곧바로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기로 작정했던 터라 사내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무 위에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헉....!”

아마 죽지는 않아도 당분간 숨을 쉬기 어려울 것이고 이미 혼절했을 터였다. 이어 그는 지체 없이 두 그루의 나무를 타고 넘으며 삼장 정도 떨어진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허나 그곳에 있던 사내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쏘아오는 능효봉을 향해 못같이 생긴 암기를 십여 개 뿌려냈는데, 그것이 철기문에서 사용하는 자오민심정(子午悶心釘)이었다.

끝에 세모꼴로 날개가 네 개 달려있어 일단 박히면 그냥 뽑히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고, 다른 자오정과는 달리 방향을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그어 날아가기 때문에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알려진 암기였다.

“흡.....!”

이 순간만은 능효봉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호흡을 짧게 들이마시고는 무언가 밟는 것도 없이 신형을 더욱 높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호선을 그리며 다가오던 자오민심정이 아래로 홱 꺾이며 사선을 그었다.

아마 상대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자오민심정을 피하려고 능효봉이 나무 아래로 몸을 날릴 것이라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능효봉의 신형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오던 중이었고, 발을 디딜 아무런 물체도 없었기 때문에 자오민심정을 날린 사내의 공격은 너무나 적절한 것이었다. 누구라도 발을 디딜 물건이 없는 상태에서 재차 더 높이 솟구쳐 오를 인물이 있을 것이라곤 예상할 수 없었다.

능효봉이 예상하지 못하는 몸놀림으로 피하자 사내는 당황했다. 더구나 이미 능효봉의 신형이 곧 바로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며 무언가 자신의 관자노리를 강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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