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준비한 조그만 갈고리를 쥐고 있으니 그것을 이용해 운중선을 타고 오를 터였다. 허나 물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모습만 눈에 비칠 뿐 이충은 수면 위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왜……? 물 속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일접의 마음은 더욱더 초조해졌다. 사람이 숨을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이충이 특별한 능력이 있다 해도 한 모금 호흡을 해야 할 시간이 지났다. 그 순간 일접의 눈에 검은 물체가 떠오르며 수면 위가 짙은 색으로 물드는 광경이 들어왔다. 수면 위를 짙게 물들이고 있는 것은 분명 피였고, 검은 물체는 힘없이 떠올랐다가 물결에 흔들리는 이충 중 하나였다.

움직임으로 보아 분명 자신의 의지로 물 위로 떠오른 것이 아니었고, 이미 혼절을 했거나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어 또 하나의 검은 물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떠올랐던 이충의 몸은 다시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당했다…!'

분명 물 속에서 누군가에게 당한 것이다. 커다란 충격이 밀려들었다. 두 명 모두 일각도 못되어 피살당한 것이다. 갑자기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운중선이 사람을 잡아먹는 끔찍한 괴물처럼 보였다. 너무나 고요한 적막 속에서 물 위에 떠있는 모습이 배가 아니라 유부(幽府)의 입구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이었다. 좌측 나무 뒤에서 검은 물체가 운중선 쪽으로 쏘아나가고 그 뒤를 이어 백색 신형 역시 쏘아나가는 것이 보였다.

'흑백쌍용…!'

일접은 당황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돌발적인 행동이 너무 무모한 짓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물론 자신들의 실수로 관 속의 여인을 분실(?)했고, 그 실수로 인해 이런 수고를 하게 된 것은 사실이니 막중한 부담과 책임을 느끼고는 있을 터였다.

더구나 이충이 죽음을 당한 것을 보고나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란 점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허나 아니었다. 저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 고요하지만 수면 아래까지도 지키고 있는 운중선의 방비라면 수면 위는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흑백쌍용이 길게 늘어진 굵은 밧줄을 타고 운중선 위로 솟구쳐 오르는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이 고막을 찢을 듯 들려오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운중선 위에서 화살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은 물체들이 우박처럼 쏘아지며 흑백쌍용을 덮쳤다. 몸을 날려 피하고, 잡아채며 나아가려 해도 일시적으로 하늘을 덮을 듯 쏟아지는 화살과 같은 암기들 때문에 흑백쌍용도 감히 운중선 위로 올라설 수 없었다. 완벽하게 진로를 막는 공격이었다.

'빨리 돌아오세요…!'

일접은 전음을 급히 날렸다. 동시에 우측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오위에게도 급히 전음을 날렸다. 이미 운중선은 완벽한 방어체계가 갖추어진 하나의 요새였다. 수면 아래까지도 완벽히 방어를 하고 있는 것을 이미 본 바가 아닌가?

여기서 더 주춤거리면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은 일단 물러나는 것이 좋다. 이런 시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주인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흑백쌍용은 그녀의 전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감히 위험을 감수하고 운중선으로 침입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인지 모르지만 급히 되돌아왔다.

'일단 돌아가세요.'

그녀는 이미 다가온 흑백쌍용에게 다시 짧게 전음을 날린 뒤 우측을 향해 오위에게도 그대로 전음을 날렸다. 흑백쌍용도 사태를 파악했는지 그녀가 몸을 숨기는 곳을 보지도 않고 땅을 박차며 연무장 쪽으로 재차 몸을 날리고 있었다.

오위마저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일접은 바싹 긴장한 채 운중선을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 운중선에서는 쫓아 나오는 자들이나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단지 운중선에 침입하려는 것을 막는 것뿐인 것 같았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비록 이충을 잃었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멍청스러운 흑백쌍용이 일을 완전히 그르칠 뻔했던 것이다. 그녀는 잠시 더 머물면서 이충이 정말 살해당한 것인지 확인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접과 사충의 관계는 공식적으로 주종(主從) 간이었지만 형제나 다름없었다.

복의 죽음에 대한 충격도 가시지 않았는데 뻔히 눈앞에서 두 명이 죽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고, 긴장이 서서히 풀리자 아련한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 일접은 의외로 겉보기와는 달리 감성이 풍부한 여자였다. 냉정하게 보이고 또한 그렇게 행동했지만 마음속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는 물속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수공(水功)에 대해 이충만큼이나 자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충이 살아있다면 오히려 성급하게 뛰어든 자신이 거추장스런 존재가 될 터였다. 기다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이미 당한 모습을 본 일접이었지만 여전히 이충이 살아 돌아올지 모른다는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일각이 지나고 이각마저 흘렀지만 수면 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를 지키자 그녀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이젠 조금 전 피를 뿜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사라진 그 검은 물체 두 개가 이충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운중선의 인물들은 평생을 배와 더불어 살아온 자들이라 수공에 대해서는 일류고수를 능가할 터였다. 그런 자들이 지키고 있는 물속이라면 이충이 수공을 익히고 있었다 해도 상대가 되지 못했을 터였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소리 없이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이었다. 일장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나무 뒤에서 검은 물체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희끗한 빛줄기가 자신의 얼굴로 쏘아오는 것이 아닌가?

"………!"

분명 검인 것 같았다. 검날의 폭이 기형적일 정도로 좁은 연검(軟劍)인 것 같았는데 그것이 그녀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피할 틈도 없었고, 피할 수도 없었다. 허공에서 두세 번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느끼는 순간 그녀는 숨이 막히는 느낌과 함께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짚단이 넘어가듯 뒤로 넘어갔다. 아마 상대가 기습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상대의 일초식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끄륵…."

목젖에서 미세하게 가래가 끓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녀의 몸이 차가운 땅에 완전히 넘어간 다음이었다. 목젖에서 피가 약간 배어나왔고, 눈을 부릅뜬 그녀의 미간에 콩알 크기의 혈흔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역시 남궁공자(南宮公子)의 검은 무섭군요…."

사내가 나타났던 곳 두세 발자국 옆에서 모습을 드러낸 중년여인의 음색에는 정말 경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매우 아름다운 중년여인이었다.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주름살이 보이지 않는 팽팽한 피부와 함께 놀랄만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아우르는 기품까지 가지고 있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헌데 약간 풍염하다고 할 몸매도 그러하지만 세월의 흐름으로 넉넉한 모습마저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면 궁수유와 매우 흡사한 모습이었고, 만약 궁수유가 이십 년 정도 지난다면 저런 모습이 될 것이었다. 저런 미모를 가지고 궁수유와 닮은 여인이라면 삼합회(三合會)의 회주인 단철수화(丹鐵手花) 궁단령(宮丹令)이 분명했다.

그녀의 경탄 섞인 시선은 여전히 일접을 일검에 죽인 사내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십대 중반의 사내는 이목구비가 뚜렷해 꽤 잘 생긴 편이었다. 하지만 그를 보는 사람은 그가 잘생겼다고 느끼지 못한다. 사내의 얼굴은 보기에 왠지 섬뜩할 정도로 느낌이 좋지 않았다. 냉소적인 표정과 음울한 기질이 보는 이의 가슴에 서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도 되오?"

사내는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