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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券 격변(激變)

밤이란 인간의 추한 속성을 가려주는 어둠이 존재한다. 그렇게 자시(子時) 정각부터 시작된 나흘째의 사건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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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어둠 속이었다. 천천히 언덕을 걸어 오르는 노인의 모습은 확연히 지쳐있었다. 원래 초저녁 잠이 많은 노인네라는 점에서도 그랬지만 아주 끈질기게 설득과 회유를 하는 상만천과 용추를 떼어내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상만천의 몸에서 가끔씩 느껴지는 살기에 그가 마음속으로 수없이 갈등을 하고 있음을 알았고, 적당한 선에서 속내를 내보이고 타협을 보아야 했다. 이런 일은 앞으로 많을 터였다. 이미 보주만큼이나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회유하지 못하면 죽이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가질 법한 것이었고,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얻으면 좋고, 얻지 못하면 매우 불리해지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각오해야 했다. 이틀이란 기간은 세월을 반추하면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손을 피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다.

노인은 자신의 움막이 보이자 턱에 까지 차오른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움막을 잠시 바라보며 들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망설였다. 분명 희미하지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각에 누가 불을 밝혀놓은 것일까?

"……?"

허나 자신의 유일한 거처였다. 숨을 잠시 고른 후에 모옥의 문을 연 귀산 노인은 탁자에 한 사내가 앉아있음을 알았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내였다.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

이 늦은 시각 주인도 없는 방에 탁자 위 황촉에 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있는 사람이 좋은 뜻으로 왔을 리 없었다. 그리고 온 자를 누가 보냈는지도 대충 짐작했다. 허나 귀산 노인은 그 낯선 사내를 본체만체 했다. 아니 아예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았다.

귀산 노인은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서 비척거리며 걸어가 한쪽 구석에 놓인 침상에 그냥 쓰러지듯이 누워버렸고, 이불을 목까지 올리고는 졸린 듯 눈꺼풀을 닫았다. 헌데 모옥 안에 있던 낯선 사내도 아주 기이한 인물이었다.

주인도 없는 방에 들어와 있으면서 주인이 들어왔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었고, 오히려 귀산 노인과 마찬가지로 누가 들어왔는지 조차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마치 목상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도 같았다. 정말 이상한 주인과 손님이었다.

그렇듯 괴이한 광경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노인은 가끔 몸이 불편한 듯 뒤척거렸으며 가래 끓는 잔기침을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낯선 사내가 자신의 거처에 들어와 있으니 잠에 쉽게 빠지지는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불 좀 꺼주겠나?"

불빛이 영 잠을 설치게 만든다는 듯 게슴츠레 눈을 뜨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끄던 말든 상관하지 않다는 듯 노인은 등을 보이고 돌아 누었고 이불을 더욱 끌어올려 머리까지 덮으려는 기색을 보였다.

팍---!

황촉불은 사내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갑자기 꺼졌다. 어차피 사내에게 있어 어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미 먹이는 손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모시는 주인께서는 노인장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시오. 이 안에서 벌어졌던,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에 대해서 말이오."

사내의 음성은 보기와는 달리 매우 나직했고 목젖을 울리는 목소리여서 그런지 듣기 매우 좋았다. 허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귀산 노인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사내는 매우 가점적인 것 같지만 뱀처럼 차갑고 냉정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저런 인물은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노부는 지금 무척 피곤해…."

단 세 마디의 대화였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불을 꺼달라는 말은 나가달라는 의미였고, 사내는 자신이 온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그것은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고, 귀산노인으로서는 시간을 벌기 위해 지금 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허나 그런 대답을 하는 귀산 노인의 몸은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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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보는 운중선은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우고 있는 서호와 더불어 장관이라 할 만 했다. 오히려 운중선은 밤에 보는 것이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것 같았다. 갑판 위는 물론 배 전체에 온통 환한 불을 밝히고 있어 웅장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허나 사람에 따라서는, 특히 저곳을 조사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저렇듯 화려한 모습의 운중선이 난공불락의 성채(城砦)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운중보 내의 조사는 마쳤다. 흑백쌍용이 관속에 넣어 들여오던 여인이 보 내로 들어왔다는 증거나 정황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직 운중선 안에서 누군가에게 빼돌려진 다음 아직도 배 안에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쉽지 않아….'

일접은 고민하고 있었다. 이미 이십 여장 길이의 부표는 걷어졌고, 네 군데 닻을 내린 운중선과 운중보와의 연결은 길게 부두에 내려진 굵은 밧줄 두 가닥 뿐이었다. 물론 저 밧줄 정도라면 전혀 흔들림 없이 타고 건너갈 수 있지만 저렇듯 환한 불빛으로 인해 혹시 있을지 모를 운중선 인물들의 이목을 피하고 무사히 잠입한다는 것은 자신할 수 없었다.

자신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흑백쌍용과 오위라면 아무리 운중선의 인원이 칠십여 명을 헤아리고 만만치 않은 해룡신(海龍神) 위일천(魏溢天)이 이끌고 있다고는 하나 모두 쓸어버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움직이다가 일이 틀어지는 경우에, 운중보의 경비인원이라도 들이닥치거나 특히 관속에 있는 여인을 납치했다가 분실(?)해서 움직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이 떳떳이 나서 조사할 수 없는 것이다 보니 더욱 조심스러웠고,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주인어른의 명으로 인해 더욱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불을 환하게 밝혀놓고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운중선이라 더욱 긴장되었다. 움직임이라도 있고, 소리라도 난다면 그것을 이용해 어찌하든 잠입을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너무나 조용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것은 포기할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사충 중 이미 죽은 복(蝮)과 백도를 감시하게 한 봉(蜂)을 제외한 두 여자를 보았다. 자신의 명을 기다린 지 벌써 반시진이 넘었다. 일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

그러자 이미 빛을 반사시키지 않으려는 듯 착 달라붙은 흑색 가죽옷을 입은 이충(二蟲)이 물 속으로 소리 없이 입수하고 있었다. 이충이 무사히 잠입한 후에 신호를 주면 흑백쌍용과 오위를 대동하고 들어갈 계산이었다.

그녀는 수면 위로 반사되는 운중선의 불빛을 보며 긴장된 마음으로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껏 이삼십 장 거리였지만 물 속을 헤치며 다가가야 하는 이충으로서는 결코 짧은 거리라 할 수 없을 것이다.

"……?"

헌데 잠시 시각이 흐르고 움직임이 나타났다. 갑자기 운중선 가까이 수면 위로 물속의 방울들이 올라오고 출렁대는 듯한 물결이 보였다. 이미 이충들이 운중선 가까이 도착했을 것이고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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