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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에 실패하고 3개월간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가장으로서 제일 못 할 짓은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 집에 틀어박혀 있는 일이다. 학교를 다녀온 아이에게 대낮에 문을 열어 줄 때 아이의 표정도 아침밥 먹으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 새삼 느껴지는 기간이었다.

그래도 늦잠은 잘 수 없었다.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 꼬박 일어났고, 대신 아침부터 케이블 TV를 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 많이 본 것이 '미드'(미국 드라마)였다.

‘롬(Rome)’과 ‘하우스(House)’, ‘CSI’ ‘라스베가스’ 네 가지를 번갈아 보니 전부 재미있었다. 특히 하우스 같은 경우는 성격 괴팍한 진단의학과 의사가 자신의 경험과 검사 결과 그리고 냉철한 의식으로 확실한 병인(病因)을 찾아가는 메디칼 드라마인데, 인턴 다섯 명의 애환을 그리는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와는 다르게 의학적인 측면이 많이 소개되어 나에게는 가장 흥미로웠다.

미드가 계속 히트를 치자 한 케이블 TV는 CSI의 날(CSI Day)라고 해서 24시간 CSI만 방영하기도 했고, ‘24’ 같은 프로그램도 하루 종일 방송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는 TV를 끼고 살았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프리즌 브레이크'(Prison Break) 같은 것도 주기적으로 5시간 연속 방영되기도 한다.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뒤늦게 미드에 맛을 들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나는 프리즌 브레이크를 48시간 연속해서 보았다”느니 “진작 보지 못 한 것이 원통하다”라느니 등의 댓글들이 심심치 않게 달려 있다.

얼마 전 '프리즌 브레이크'에 나오는 주인공 ‘웬트워스 밀러’라는 배우가 CF를 찍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석호필(주: 프리즌 브레이크라는 드라마에서 그의 이름은 스코필드이다. 석호필은 원래 프랭크 W. 스코필드라는 영국의 의사이자 선교사가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와서 살면서, 일제의 포악성을 세계에 알린 인물의 한국 이름이다. 이 이름을 따서 스코필드를 석호필이라고 부른다)에게 열광하는지 어리둥절 했다는 언론들의 기사는 아직 기성세대가 미드를 잘 접해 보지 못했음을 말한다. 그러나 기성세대와 다르게 젊은이들의 미드에 대한 열광과 중독은 무척 심한 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미드에 사람들이 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미국 드라마의 다양한 소재에 그 이유가 있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섹스 앤 더 시티’'위기의 주부들'로부터 시작해서 액션 미스터리인 ‘프리즌 브레이크’와 ‘24’ 그리고 수사물인 ‘CSI’와’크리미널 마인즈(Criminal Minds)’, 병원을 소재로 한 ‘그레이 아나토미’와 ‘하우스(House)’ 등 미드의 다양성은 시청자의 여러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한 인터넷 미국 드라마 클럽에 올려져 있는 미국 드라마의 종류는 거의 200여 가지에 이른다. 이것들 대부분이 연재물로 되어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탄탄한 구성과 진부하지 않고 빠른 전개, 드라마라는 장소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인간의 내면성을 드러내는 배우들의 연기력 등이 시청자들을 계속해서 미드에 빠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특성이 중독성의 창조라면 이러한 미드의 구성요소와 전개방식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요는 이러한 미드가 우리나라 드라마의 부진 때문에 더욱 창궐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가족이 모여 TV를 보는 시간까지 침투한 불륜 드라마들, 우연성이 너무 많이 결부되어 어색한 구성 요소 등 장르의 편협함과 소재의 빈곤 그리고 극적 전개의 무리를 드러내는 한국 드라마는 '주몽'처럼 가끔씩 시청률 50%를 돌파하는 것 이외에는 다 그저 그렇고 그런 시청률 10% 내외의 드라마다. 사람들이 쉽게 채널을 케이블 TV로 돌리고 미드나 영화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FTA 협상 체결로 미국인에 의해 미국 드라마의 직접 방영이 가능하게 된다면 국내의 안방 드라마는 더욱 혹독한 시련을 치룰 게 뻔하다. 영화는 영화대로 73일이라는 스크린 쿼터에 묶여 기를 펴지 못 하고 있고, 안방극장은 안방극장대로 ‘미드’에 점령 당한다면 우리는 가히 비쥬얼 면에서 미국의 문화 식민지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신선한 소재 및 배우•작가의 발굴과 외주제작의 합리성을 찾고 다양한 장르를 통해 시청자에게 다가가야만 한다. 드라마 시청은 시청자에게 애국심을 강요하거나 권고할 사항이 아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서 재미있고 흥미롭지 않으면 보지 않는다. 채널의 선택권은 전적으로 시청자의 몫이다. 미드가 재미있긴 하지만 한편으로 국내 TV드라마가 못내 우려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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