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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 입구에는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에 있는 사자상의 모형이 있다.
ⓒ 조수영

▲ 호랑이 모양의 옥새. 이 옥새는 고조가 죽고 16년간 정권을 잡았던 황후 여태후의 것으로, 고조와 여태후의 합장묘인 장릉에서 출토되었다.
ⓒ 조수영

2천 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섬서성 박물관

서안의 마지막 코스는 섬서성(陝西省 산시성) 역사박물관이었다. 첨엔 여기까지 와서 웬 박물관이냐 했지만, 들어서는 순간 벌어진 입은 나올 때까지 다물어지지 않았다. 당나라 시대의 건축양식에 따라 지어진 건물에는 선사시대 유물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섬서성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시대 순으로 전시해 놓았다.

전시관 입구에는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에 있는 사자상의 모형이 있다. 1실 입구에는 섬서성의 지형도가 있는데 마치 무릎을 꿇고 활을 쏘는 병마용의 모습을 닮았다.

서안근처의 반파유적은 선사시대의 유물인데 대표적인 유물은 물고기를 먹는 모습이 그려진 그릇이다. 질그릇에 그려진 원시적 부호는 음양사상이 나타낸다고 하는데 이해하기 어려웠다.

청동기 시대인 주나라의 유물에는 제사용 그릇인 정(鼎)이 많았다.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제사를 올리는 장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보통 3-4개의 다리가 있는데 윗부분에 커다란 두 개의 귀가 달려 있다. 정의 크기와 개수는 권력을 상징했기 때문에 왕은 이를 과시하기 위해 수백 명을 동원하여 거대한 정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화려하고 풍부한 당문화

▲ 시황제는 장군들을 엄격히 통제하기 위해 호랑이 모양의 신표인 호부를 나누어 하사했다. 장군들은 호부의 다른 반쪽과 일치해야만 명령할 수 있었다.
ⓒ 조수영

진시황제로 대표되는 진나라 시대는 주로 시황제의 업적에 대해 전시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모양의 글자를 통일한 과정, 도량형 단위를 측정할 때 사용했던 원기, 병마용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나라(BC202-AD220) 시대로 넘어오니 도자기 인형의 크기가 현저하게 작아지고 그 솜씨 또한 뒤쳐지는 것 같다. 진시황제 때 도공들이 많이 죽거나 생매장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진남북조시대로 오면 잦은 전쟁 탓에 병사나 말, 마차를 막기 위한 철침 같은 전쟁 관련 유물이 많다. 땅딸막한 체구에 턱수염을 기른 북위의 전형적인 무인상이 인상적이다.

▲ 한나라 어느 제후무덤에서 나온 부장품. 도공이 사라진 한나라의 유물은 작고 조잡하다.
ⓒ 조수영

▲ 작(爵). 왕실에서 의식을 치를 때 사용하던 술잔이다. 새부리 모양의 주둥이와 3개의 긴 다리는 신석기 시대부터 널리 쓰인 형식이다.
ⓒ 조수영

영토를 확장하여 세계제국을 이룬 당나라의 문화는 북조의 강건한 문화와 남조의 화려한 문화가 섞여 있다. 여기에 서역에서 들어온 국제적인 문화가 더해져 당나라는 풍부하고 화려한 귀족문화가 꽃폈다.

수당 시대관에는 발달한 장안의 모습과 화려한 당삼채, 섬세한 조각의 거울, 주전자 등이 가득하다. 당삼채란 투명한 백색 유약과 녹색과 갈색의 배합이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주로 당대 귀족들의 부장품으로 만들어졌다. 주로 남녀의 인물상이나 묘지의 수호신으로 말, 낙타 등의 동물과 당나라 특유의 형태인 항아리, 병 등을 만들었는데 당시의 풍속을 잘 보여준다.

▲ 귀족들의 부장품으로 만들어진 당삼채. 백색, 녹색, 갈색의 혼합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 조수영

▲ 춤추는 말이 술을 마시는 모습이 새겨진 은도금 술병
당시 금속세공사들은 금속판의 안쪽을 쳐서 겉으로 도르라지게 하는 기법과 두가지 색채로 입체효과을 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모양은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가죽술병을 본떠서 만들었다.
ⓒ 조수영

특히 영태공주묘에서 출토된 기마용은 구레나룻이 무성한 서역계 무사가 말을 타고 가면서 표범과 호랑이를 주먹으로 때려잡는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사는 부리부리한 눈빛에 총명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당시 장안의 이국정취가 잘 반영되어 있다.

서안의 마지막 밤... 천년의 잠에서 깬 당무

서안의 마지막 밤을 '대당락무(大唐樂舞)' 공연을 보며 보내기로 했다. 당시대의 문화를 재현한 공연이다. 당나라 시대는 중국 고대무용 발전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당의 전성기를 열었던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있을 때 일어난 안녹산의 난 이후, 2백여 년에 걸친 뒤뚱거림 끝에 당은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무려 천 년이 넘는 침묵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중국인들에게 사랑받았던 당무는 대부분 그 맥이 끊겨버렸다. 사람들도 가고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최근에 이르러 돈황에 있는 당대의 벽화와 몇몇 시문에 담긴 글을 통해 몇 가지를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공연장으로 들어가니 대부분이 서양인이다. 정서가 같은 한국이나 일본인과 같은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에게 훨씬 어필한다는 것이다. 설명도 중국어에 이어 영어로 나온다. 대략 열 가지 정도의 춤이나 음악을 보여준다. 관광객들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공연을 감상하거나 식사 없이 공연만 볼 수도 있다.

첫 번째 무대는 당현종과 양귀비가 화려한 옷을 입고 등장한다. 이어지는 중국 고유악기의 연주는 국악기의 생황과 그 모양과 소리가 똑같다. 국악에서는 바닥에 앉아서 정적인 연주를 하는 반면, 중국의 악기는 리듬감이 있고 춤사위도 함께한다.

관객의 반응을 보고 호흡을 같이하는 적극적인 무대다. 화려한 여자 무용수의 옷은 조명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바뀐다. 수오나라고 부르는 악기는 태평소와 너무 흡사하다. 금색의 나팔을 부는 악사는 갑자기 악기를 놓고 자신의 목소리로 악기의 소리를 낸다. 신기함에 모두가 함성과 박수를 쳤다.

▲ 당락무 공연. 당현종과 양귀비가 화려한 옷을 입고 등장한다.
ⓒ 조수영

진나라 용사의 춤은 역동감이 넘친다. 개인적으론 천수관음의 춤이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여러 명의 무희들이 뒤로 겹겹이 이어서서 각자의 손을 펼친다. 그러나 정면에서 보면 한 명의 보살이 찬란한 움직임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부대에서 현종과 양귀비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다시 모습을 보이고 인사를 하며 막을 내렸다. 화려함과 흥미로움이 서안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에 충분했다. 한편으로 우리 국악도 임금님 앞에서 연주했던 정적이고 지루하기까지 한 정악 연주의 굴레에서 벗어나 대중의 발전에 어울리는 시대에 맞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절실함이 느껴지는 밤이었다.

▲ 사막에서 작업 중인 유전. 중국은 석유의 수송을 위해 타클라마칸을 관통하는 도로도 건설했다. 석유의 힘은 돌아오지 못하는 사막, 타클라마칸도 돌아올 수 있게 했다.
ⓒ 조수영

'오일로드'로 부활하는 뉴실크로드

그런 실크로드가 꿈틀거리고 있다. 얼마 전 중앙아시아와 흑해 주변에 위치한 12개국의 지도자들은 획기적인 협약에 서명하였다. 그것은 유럽과 중국을 잇는 육로와 해상로 및 항공로를 구축할 것과 이 길이 통과하는 모든 지역에서 관세의 장벽을 차츰 제거해 나가기로 합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동서를 잇는 거대한 자유무역지대를 설립하자는 내용이다.

협약에 동의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종속되어 있던 국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되어 나오면서 정치적, 경제적 공백 상태가 생겼다. 뉴실크로드 프로젝트는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공백을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혁과 개방 이래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의 힘이 이제 이곳 서부로 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타림분지 아래에 700억 톤 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산하고 있다. 그 양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매장량의 2배에 달한다. 중국은 신강지구와 중국의 중심을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에 100~120억을 투자하고 있다

중국은 석유의 수송을 위해 타클라마칸을 관통하는 도로도 건설했다. 노동자들은 여름엔 70도가 넘고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몇 년씩 중노동을 했다. 석유의 힘은 돌아오지 못하는 사막, 타클라마칸도 돌아올 수 있게 했다.

불모의 땅으로 생각되었던 이곳은 황금의 땅으로 부활했고,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유전, 천연가스 등 에너지 기지로 바뀌고 있다. 과거 실크로드의 화려했던 영광은 거대한 자유무역 지대로 거듭날 것이고, 21세기에 '오일로드'로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 아름답고 신비한 천수관음의 춤. 여러 명의 무희들이 뒤로 겹겹이 이어서서 각자의 손을 펼친다. 정면에서 보면 한명의 보살이 찬란한 움직임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 조수영

실크로드의 부활을 꿈꾸며

실크로드 여행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오래전 실크로드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동서 교류의 중심 통로였다. 지난 2천여 년 동안 수많은 상인과 순례자, 탐험가와 종교인들이 이 길을 통해 무역을 했고, 문화와 종교를 전했다.

그러나 동서 교역의 중심인 실크로드는 차츰 쇠퇴했다.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도시들도 차츰 빛을 잃어갔다. 16세기 이후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실크로드라는 육상의 교역로가 쇠퇴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해상교역로의 개척이었다. 선박과 항해술의 발전에 따라 해상교통이 보다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에 따라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해상교역로가 발전하였다.

둘째, 주요 교역품의 변화이다. 실크로드 초기에 비단은 중국만이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그 생산지역이 점차 확대되었고, 주요 고객이었던 유럽의 면모직물공업이 발달에 따라 비단에 대한 수요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비단이 쇠퇴하면서 중국의 수출품으로 등장한 것이 도자기였다. 당시 유럽의 도자기기술은 그다지 우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자와 같은 중국의 도자기는 유럽에서 값비싼 명품으로 거래되었다. 이런 도자기는 파손의 위험성 때문에 육로로는 운반할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해상무역이 더욱 확대되게 된 것이다.

셋째, 중국의 고립정책 때문이다. 1368년 건국한 명나라는 고립적인 안정책을 선택했다. 명나라의 고립정책은 청나라로 이어져 발전하고 있는 서구 세계와의 관계는 더욱 멀어졌다.

그 후 서구의 세력이 강제로 아시아를 개방시킨 19세기 말까지 실크로드는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사라진 전설이 되어 침묵 속에 묻혀 버렸다. 또한 많은 오아시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사막의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 신비에 쌓인 전설의 도시로 사라지게 되었다.

15세기까지 이슬람은 실크로드상의 모든 도시를 이슬람화 시켰다. 사람의 모습을 묘사한 형상문화를 금기시하는 이슬람은 실크로드에 번성했던 불교문화를 파괴하였다. 그 옛날 실크로드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사원과 석굴, 불상과 벽화는 비참하게 파괴되었다.

또한 실크로드의 유적과 유물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 열강들은 지리적 공백 지대나 마찬가지였던 중앙아시아 지역에 앞 다투어 진출해 석굴사원의 벽화를 뜯어가고, 고대도시 유적이나 고분을 무참히 파헤쳐 유물을 자기네 나라로 가지고 갔다.

그나마 지금 실크로드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은 그 뒤에도 거의 방치된 상태로 있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 국가의 보호에 의한 것이다. 그것조차도 사막과 초원지대의 난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로 급속히 파괴되어 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번 기사를 마지막으로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을 마칩니다. 그동안 많은 관심과 질책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여행의 기록을 감히 여러분께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오마이뉴스>를 만난 것은 저의 인생에 행운이었습니다.


태그:#섬서성박물관, #당락무, #서안,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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