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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책 표지. ⓒ 여시아문
이 <선방일기>는 애초에 1973년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당선된 글이라고 합니다. 발표되고 난 후에는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는데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현대불교신문>에 연재되었는데 독자들의 호응이 대단하자 단행본으로까지 출간된 것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저는 처음에 이 책을 사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책의 전부를 벌써 오래 전에 인터넷으로 다운받아서 읽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지요. '좋은 책이구나' 생각했지만 돈을 들여서 따로 구입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책을 쓰신 지허스님이 한때 선암사 주지를 지내고 지금은 금둔사에 가 계시는 그 지허 스님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아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분에게서 두 스님은 같은 분이 아니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지허 스님은 서울대를 나온 뒤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우신 탄허 스님의 상좌가 되어 열심히 수행하던 납자였는데 이 원고를 발표한 두 해 뒤인 1975년에 입적하셨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저자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터라, 아차 싶었던 저는 새삼스럽게 종이책을 사서 정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답니다.

처음 몇 장만 빼면 책은 오대산 상원사 선방에서 보낸 동안거 3달(10.15~1.15) 동안에 있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적었습니다. 책의 첫머리는 지허 스님이 10월 1일 오대산 상원사에 도착해서 방부(중이 남의 절에 가서 좀 있기를 청하는 일)를 알리고 허락받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겨울채비를 끝내고 동안거에 들어가다

도착 다음 날인 10월 2일엔 김장 울력을 하고, 10월 5일엔 메주 쑤는 작업을 하면서 동안거에 들어갈 준비를 갖춥니다. 그리고 10월 15일이 되자 마침내 결제에 들어갑니다. 결제에 참여할 스님은 모두 36명. 결제 기간에 각자가 맡을 23가지의 소임을 정한 뒤 오후 1시, 본격적인 수행을 위해 선방에 들어갑니다.

스님들의 소임 중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몇 가지만 적어 보자면 수두(水頭)-식수관리, 화대(火臺 )-군불때기, 공사(供司)-주식담당, 채두(菜頭)-부식 담당, 원두(園頭)-채소밭 담당 등 입니다. 지허 스님은 땔감 담당인 부목을 맡습니다. 원력 높으신 스님들이 마치 초등학생들처럼 역할을 분담하시니 약간 우습지요?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도 조개젓을 얻어먹는다'는 속담 아시지요? 절에 가서 눈치랄 게 뭐 있겠습니까? 소임을 맡은 스님들을 부르는 명칭을 알아 두는 것. 그게 바로 눈치지요. 배고프면 원주 스님을 찾아야 하고 절집의 전각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부전 스님을 찾아야 빠르답니다.

10월 20일의 일기는 수행에 들어간 선방의 구성원에 대해 열거하고 나서 이렇게 선객들의 행태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철저한 자기본위의 생활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극히 비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비정한 자기본위의 생활에 틈이 생기거나 흠결이 생기면 수도란 끝장을 알리면서 선객은 태타(怠惰)에 사로잡힌 무위도식배가 되고 만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비정할수록 견성의 길은 열려지는 것이다.(중략)진실로 이타적이기 위해서는 진실로 이기적이어야 할 뿐이다. 모순의 극한에는 조화가 있기 때문일까. - 33쪽

선방의 규범과 청빈한 생활

동안거 10일 째인 10월25일의 일기는 선방의 생활 규범에 대해서 적고 있습니다. 두량 족난 복팔분(頭凉 足煖 腹八分)이 전래되는 선방의 생활규범이라고합니다. 즉 '머리는 시원하게, 발은 따뜻하게, 배는 배가 꽉 차는 10눈에서 2분이 모자라는 8분을 유지하라'는 이야기지요. 거기에다 먹을 것 부족, 옷부족, 잠부족 등 삼부족(三不足)’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니 아주 극한적인 금욕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허 스님은 선객이 일년에 소비하는 물적 소요량을 조목조목 적고나서 "합계 2만원이면 (1년을 사는데) 족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1970년대 초반, 스님들이 얼마나 청빈하고 금욕적인 안거 수행 생활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잘 따지고 보면 납자는 철저하게 욕망의 포로가 되어 전전긍긍한다. 세속인들이야 감히 엄두도 못 내겠지만 생사 문제까지 놓아버리고 부처가 되겠다는 대욕에 사로잡혀 심산유곡을 배회하면서 면벽불이 되어 스스로가 정신과 육체에서 고혈을 착취하는 고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무욕은 대욕(大慾)이기 때문일까. - 37쪽

10월 30일. 보름과 그믐에는 삭발하고 목욕하고 세탁을 합니다. 세탁을 하게 되면 옷에 붙은 이 따위 중생을 살생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불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보름과 그믐에 맞추어 하는 것이랍니다. 오후에는 계율을 설명하고 죄가 있으면 고백하고 참회하는 포살이 행해집니다.

큰방 조실과 뒷방 조실

아무리 엄격한 수행 공간인 선방이라고 해도 그곳 역시 사람이 사는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열심히 수행에만 정진하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게으르고 요리조리 빠질 궁리만 하는 스님도 아주 없진 않을 테지요.

어느 선방이거나 큰방 조실이 있음과 동시에 뒷방 조실이 있다. 큰방 조실은 법력으로 결정되지만 뒷방 조실은 병기(病氣)와 구변(口辯)이 결정짓는다. 큰방에서 선방의 정사가 이루어진다면 뒷방에서는 야사가 이루어진다. 선방에서는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에 의해 우세가 결정되기도 한다.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많은 스님은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고,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은 스님은 점차로 선객의 옷이 벗겨지게 마련이다. - 46쪽

'산문의 총사 격으로 선리 강화 및 참선지도' 를 해주는 큰 스님이 조실이지요. 그래서 조실 스님이라 하면 속인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습니다. 그러나 뒷방 조실'은 그와는 정 반대인가 봅니다. 선방의 숨겨진 이면을 보니 거기도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더군요.

선 수행 '공공의 적' 본능

11월 7일 일기에는 정신이 먼저냐? 육체가 먼저냐? 불공 담당인 지전 스님과 부목 스님 간의 논쟁이 나옵니다. 논쟁은 점차 발전해서 "견성은 육체적인 자학에서만 가능한가? 생식이나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일종식이나 묵언, 장자불와 등은 구도심의 발로인가 위선인가?"로 넘어가지만 쉽게 시비를 가리지 못한 채 논쟁은 끝이 납니다.

지허 스님은 이 논쟁에 대해서 "중생이 사는 세상에서 시비란 가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생이 바로 시(是)와 비(非)로 구성된 양면적인 존재니까"라고 촌평을 덧붙입니다.

11월 15일 일기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인 식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대중 공사로 벌인 찰밥 별식 때문에 배탈이 나서 오후 입선시간에 결석자가 10여명이나 나옵니다. 그의 옆자리에 자는 스님이 "인간의 본능억제란 미덕일까요? 부덕일까요?"라고 말을 걸어오는데 지허스님은 "다사(多思)는 정신을 죽이고 포식은 육체를 죽인답니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11월 23일치 일기에는 참선하는 스님들이 고방의 감자를 몰래 꺼내다 구워 먹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감자를 훔치려는 스님들과 원주 스님의 머리싸움이 볼만합니다. 감자가 자꾸 없어지자 견디다 못한 원주 스님은 묘책을 강구하는데 그 묘책이란 게 스님들이 감자에 물리도록 감자에 편중된 식단을 짜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식성의 간사함을 잘 파악하고 이용한 원주스님의 지략이 얄밉게도 판정승을 거두지요.

별식인 만두국을 먹었던 12월 15일의 예화도 상당히 교훈적입니다. 빙 둘러 앉아서 속을 넣어 만두를 빚던 스님들은 슬며시 장난기가 발동해서 만두속에다 아무도 모르게 고추가루를 넣어 빚는가 하면 깨소금을 넣어 빚기도 하고 무우쪽을 넣어서 빚기도 하는데 그걸 모른 채 공양 시간에 만두를 먹던 스님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여간 난리가 아닙니다.

그때 조실 스님이 들려준 예화는 만두속에다 장난질을 했던 스님들과 소란스럽게 만두국을 먹던 스님들 모두를 부끄럽게 합니다.

“옛날 어느 회상(큰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도량)의 공양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간에 앉아 공양하는 조실스님의 눈길이 공양하는 행자에게 주어졌대요. 그런데 그 행자의 국그릇에 생쥐가 들어 있었어요. 행자는 대중이 알까봐 얼른 국그릇을 입에 대고 생쥐를 삼켜버리더래요. 그러자 탁자위의 부처님이 손을 길게 뻗어 행자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더래요. 행자가 국 그릇에서 삶아진 생쥐를 꺼낸다면 대중들의 비위가 어떻게 되겠어요.(후략)" - 104쪽

해제가 가까운 1월 3일치 일기는 생식을 하다가 급기야 단식기도에까지 들어간 스님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고행을 생각하기도 하고 느끼기도 한다는 그런 스님에게 지허 스님은 "자성(自性)을 무시하고 인간의 작위에 성명을 맡기는 자는 언제나 허위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라고 말하면서 "고행을 생각한다거나 느낀다면 이미 고행은 아닐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생식하는 스님은 그만 단식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바랑을 걸머진 채 선방을 떠나고 맙니다. 아마도 자신의 위선이 견디기 힘들었던가 봅니다.

올깨끼와 늦깨끼, 화두 혹은 용맹정진

11월 20일 일기에는 올깨끼와 늦깨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올깨끼와 늦깨끼란 불가에서 스님을 입산 시기의 빠름과 늦음에 따라 구분해 부르는 말입니다. 지허 스님은 성욕이 생기기 시작하는 10세 전에 입사한 스님을 '올깨끼'라고 정의하고 그 후에 입산한 스님을 '늦깨끼'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올깨끼는 예불 등 절 풍속 능숙하고 늦깨끼는 입산 동기가 뚜렷하며 생사를 걸고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하면서 "불가에서는 발심과 기연(機緣)을 매우 중요시한다"고 말합니다. 입산초기의 혼신적인 구도열이 자꾸 쇠퇴해지는 이유는 "발심과 기연을 망각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듯 합니다. 그는 또 참선할 때 정신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 붙드는 하나의 공안인 화두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화두는 견성의 목표가 아니라 방편이다. 여하한 수단도 목적이 달성되면 정당화 되는 것처럼 여하한 화두도 견성하고 보면 정당해진다. 화두가 좋으니 나쁘니, 화두다 아니다 라고 시비함은 미망일 뿐이다. 훌륭한 선객은 화두에 끌려 다닌다. 절대로 끌어서는 안 된다. - 84쪽

그는 '화두 잃고 약 찾는 스님은 이미 선객이 아니라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폐물'과 마찬가지라고까지 일갈합니다.

결제 기간의 반살림이 지나면 장좌불와한 채 주야로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해야 하는 규칙이 있나봅니다. 12월 1일의 일기는 이 용맹정진에서 탈락했던 스님들은 자꾸만 나태해져 가고 스스로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현상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해제 전날인 1월 14일, 바랑을 꾸리면서 지객 스님과의 대화를 나누는데 지허스님은 화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일깨웁니다.

"순간의 생명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어찌 순간인들 화두를 놓을 수가 있습니까. 화두를 놓으면 중생이요, 화두를 잡고 있는 한 열반의 길에 서 있는데…." - 130쪽

1월 15일, 마침내 석달동안의 동안거가 끝나고 해제의 날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회자정리'를 되뇌며 36명의 스님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인간학 사전인 동시에 불교 생활사전

지허 스님이 쓴 <선방일기>는 분량이 두꺼운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안거를 준비하고 동안거 수행을 하는 동안의 스님들의 일상을 잔잔하게 풀어놓은 지허스님의 일기는 읽는 이에게 결코 적지 않은 감동을 안겨줍니다. 책을 읽는 내내 옛시절의 청빈했던 스님들의 모습과 내적으로 충일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스님들의 모습이 제 자신을 어떤 동경과 그리움의 세계로 끌고 가는 듯했지요.

이 책이 가진 미덕 가운데 하나는 지허 스님의 짧고 명쾌해서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을 읽는 즐거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님은 어느 대목에서도 버벅거리거나 미적거리지 않습니다. 그의 날카로운 촌평은 때로 냉소적으로 보일 때도 없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따스함을 잃을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선방일기>는 때로는 불교생활사전 같기도 하고 인간학 사전 같기도 합니다. 방부니 공사니 하는 일반에게 생소한 불교 용어들을 풀이해준다는 점에선 불교생활사전 같기도 하고 선 수행을 하는 스님들의 내면에 숨겨진 본능과 위선을 까발린다는 점에선 인간학 사전이라 할만 합니다.

고방의 감자를 훔쳐내어 몰래 구워먹기, 만두국을 먹기 위한 울력에서 장난기를 발동해 고추가루를 집어넣는다거나 1월 1일의 '감자 구워내기' 윷놀이 같은 장면은 스님들의 추한 면모를 들여다 본 다기 보다는 인간적 면모를 본 것 같아 오히려 좋았습니다.

상원사에 도착한 다음날 김장을 끝난 후 조실스님을 도와 시래기를 뒤지던 지허 스님에게 조실 스님이 들려주시던 이야기를 여기 옮기며 글을 맺습니다.

"옛날 어느 도인이 주석하고 계시는 토굴을 찾아 두 납자가 발길를 재촉했었다오. 그런데 그 토굴에서 十리쯤 떨어진 개울을 건너려고 할 때 이런 시래기 잎이 하나 떠내려 오더래요. 그러자 두 납자는 발길을 멈추고 이렇게 중얼거리더래요. '흥, 도인은 무슨 도인, 시래기도 간수 못하는 주제인데 도는 어떻게 간수 하겠어. 공연히 미투리만 닳게 했구료'하면서 두 납자가 발길을 되돌려 걷자 '스님들, 스님들, 저 시래기 좀 붙잡아 주고 가오. 늙은이가 시래기를 놓쳐 십리를 쫓아오는 길이라오' 두 납자가 돌아보니 노장스님이 개울을 따라 시래기를 쫓아 내려오고 있더래요. 시래기를 붙잡은 두 납자의 토굴을 향한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겠지요."

덧붙이는 글 | 선방일기/지허스님/여시아문/ 값 5,000원


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견동한 그림, 불광출판사(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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