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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서적
처지가 비슷하다 보면 생활패턴도 비슷해지기 마련인가. 남들은 들로 산으로 나들이 일정을 짜기 바쁜 이 봄날에 뒷산 올라갔다 내려오는 거 말곤 딱히 할 일 없는 주말풍경이 스스로도 한심해 싱숭해하던 차, 문자왔다고 외치는 휴대폰 신호마저 반갑다.

날아온 문자를 보니 작품 한답시고 화실에 컵라면 쌓아놓고 사는 친구다. 끌끌 혀를 차주고는 동래전철 역 근처 카페로 득달같이 나갔다. 친구는 덩치에 어울리잖게 앙증맞은 시츄를 끌어안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맡게된 강아지라는데 어떠냐니까 일초도 안걸려 답이 튀어나온다.

"사람하고 똑같아. 정말 똑같다니까."

어찌나 똑같은지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젓는 친구에게 나 역시 너무 잘 알고 있노라 안심시켰다. 개라는 동물이 얼마나 친인간적인지, 먹여주고 재워만 주는 주인에게 바치는 그들의 순도 100%짜리 믿음과 애정이 얼마나 민망할 정도인지 개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또한 개를 키우다 보면 분명히 알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어떤 개도 연습용이나 대체용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애들 정서에 좋아서 개를 데려다 키운다는 정도라면 또 몰라) 개의 1년이 사람 7년에 해당하니까 개의 죽음으로 사람과의 이별을 연습해 볼 수 있어 좋다는 식으로 내뱉는 사람은 절대로 애견가라 할 수 없다는 걸 개를 키워보면 저절로 알게되는 법이다.

정말 그럴까 의심스러우면, 그리고 혼자사는 게 적적하거나 사람한테 부대끼다 못해 넌덜머리가 나든가 개를 한번 키워볼까 마음먹은 적이 있다면 존 그로선의 <말리와 나>를 읽어 볼 일이다. 저자는 '개죽음'으로 사람과의 이별연습을 하는 야멸찬 개주인과 다를 것 없는 이유로 개를 키우기 시작해 자전적 소설을 펴내기에 이르렀다.

존 그로건 부부가 처음 개를 맞아들이려 했던 건 자신들이 장차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 여부를 동물 돌보는 것으로 타진해보자는 이유에서였다. 그랬던 그로건 부부도 '세상에 말리 같은 개는 없었다'는 사후 진단을 받은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증상이 농후한 리트리버종 개 '말리'와 함께 살게 되면서 깨닫는다. 개는 애들 정서함양 내지 상황판단을 돕는 보조 대체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과의 감정교류가 가능한 존재라는 걸 말이다.

말리가 13세의 고령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로건은 안락사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로건은 온집안을 어질러놓고 문짝과 가재도구를 부수고 마당을 파헤치고 차안에 온통 침을 묻혀놓았던, 생존시 세상에서 가장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했던 말리를 추억하는 칼럼을 쓴다. 그 결과?

다음날부터 그로건에게 수백 통의 메일이 날아들고 '세상에 말리 같은 개는 없었다'는 게 완전 착각이었던 걸 알게 된다. 차고 넘칠 정도는 아니라도 말리 같은 개는 세상에 많았다. 자신이 지금 키우고 있는 개가, 혹은 자신이 키웠던 개가 얼마나 멍청하고, 얼마나 주책 대책 없고, 얼마나 집안 살림을 망쳐놓고, 날이면 날마다 갖가지 분란을 일으키는지 낱낱이 고하는 메일에는 그들이 돌보고 키운 말썽꾸러기 개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해 <말리와 나>는 말리에 대한 추억과 함께 전국의 골칫거리 개주인들로부터 날아든 메일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일러주고 진정한 소통이 어떤 건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대낮부터 맥주잔을 함께 기울이며 나는 여러모로 칠칠치 못한 친구 품에 안겨있는 시츄를 염려하여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단점조차도 사랑했다"고 회고하는 그로건의 말을 들려주고는 <말리와 나>의 일독을 권했다. 친구는 그러나 시츄의 눈을 그윽이 응시하며 내 말을 무시했다.

"말리는 말리고 쭈쭈는 쭈쭈야."

맞는 말이었다. 친구가 이미 시츄를, 아니 쭈쭈를 키우고 있다는 걸 내가 깜박했던 것이다.

말리와 나 - 사전없이 원서읽기

존 그로건 지음, 황소연 해설, 스크린영어사(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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