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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체결 이후에 대한 분분한 예측에서 FTA 찬성과 반대 양측에서는 FTA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이유를 감안해야겠지만 대체로 논의의 마당은 '국내'로 한정되어 있다. 여전히 민족국가의 국경은 인간의 심상지도에도 또렷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 다시 민족은 상상된 공동체냐 아니냐의 끝나지 않을 논쟁을 되풀이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물 안 개구리마냥 한미FTA를 비롯한 정치경제적 사건을 조망하는 데 밖에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당위성 정도는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밖에서 보는 눈이 없다면 한미FTA 체결에 대한 비판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는 울음소리로 격하되고 찬성 목소리와 섞여 사라질 뿐이다.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백승욱이 내놓은 <자본주의 역사강의>(2006, 그린비)는 자본주의의 역사궤적을 세계체계라는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았던 학자들의 논의를 정리한 것이다. 본서의 원본이 강연을 목적으로 작성된 만큼 구어체로 된 편집이라 첫인상은 쉽게 다가올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책장을 넘겨 갈수록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님을 밝힌다.

국내서 보기 드문 탁월한 세계체계론 정리

본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가를 수 있는데 먼저 세계체계 담론의 주춧돌인 페르낭 브로델을 시작으로 칼 폴라니,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지오반니 아리기 등의 학자들의 논의를 요약하고 저자 나름의 비판적 정리를 시도한다. 이와 함께 후장에서는 이러한 세계체계 담론을 기반으로 뜨거운 화두인 신자유주의의 금융세계화, 한미FTA를 비롯한 동아시아와 세계체계 등의 분석에 할애하고 있다.

500여 페이지를 넘는 두터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말하면 지금까지 번역, 저술을 막론하고 세계체계 관련 서적 중에서 이 정도 양질의 '적절한 요약본'이 국내에 출판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최근에 제도권 경제학에서의 냉대는 여전하지만 진보진영에서 다시 보기 시작한 '지하 전통의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 논의를 본격적인 세계체계론 서적 안으로 받아들여 상당 부분을 할애한 점과 참고문헌에서나 마주쳤던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저자의 입을 빌어 좀 더 뜨겁게 본문에서 부딪히게 했던 시도, 마지막으로 겉핥기일 수밖에 없었던 지금까지의 세계체계론을 동아시아를 비롯한 한국지형 위에서 첨예하게 결속시키려고 노력을 단 한권으로 끝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역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김윤자는 <황해문화> 2007년 봄호에 백승욱의 <자본주의 역사강의>에 대한 서평을 기고했다. 앞서 기자가 지적했던 본서에 대한 장점에 대해서 김윤자는 동일선상이다. 다만 필자가 김윤자의 지적에 대부분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는 이견을 내비치고자 한다.

어떻게 전망의 통찰을 확보할 것인가

김윤자는 <자본주의 역사강의>가 "자본주의를 하나의 사회구성체로 파악하든, 혹은 이들의 주장대로 세계체계로 파악하든, 오히려 문제는 자본주의가 어떤 이유와 동력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다음 체계(그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르든 대안체계라고 부르든)로 넘어가느냐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기존 담론을 네거티브하게 비판하는 것 외에 이들 담론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동학, 전망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먼저 '…하든'이라는 어법부터 당혹스럽다. 세계체계론의 태생적 한계이자 장점일 수 있는 거시적 분석틀은 그 어떤 단계로 넘어가는 마디의 '이음새'를 포착하는데 탁월하지만 그 마디 내부에 대한 논의를 '…하든' 식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리고 마디마디의 '동학'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자본주의 역사강의>의 두터운 분량은 그 마디안의 역사적 자본주의의 동학을 설명하는데 상당부분을 할애했다. 김윤자는 백승욱의 마르크스 자본주의 분석을 "역사없는 역사성"이라고 한 것에서 아쉬운 대목이라고 했는데 그 또한 마디 안의 자본주의 역사를 사회구성체든 세계체계든이라는 양비론 혹은 양시론적인 이도 저도 아닌 입장주의 또한 '역사없는 역사성'의 혐의가 씌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두터운 분량의 책을 짧은 글인 서평을 쓸 시에는 글자 하나에도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다음으로 적극적인 동학,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서 누구는 얼마나 대안을 만들었느냐는 진보를 향한 고루한 비판 혹은 비난을 여기서 되감기하자는 것은 아니나 백승욱은 본서에서 적어도 80년대 한국사회의 '지금-여기'가 어디며, 어디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는 지에 대한 사회구성체론의 소멸된 불씨를 살려서 주변부 자본주의론과 함께 싸잡아 사라진 세계체계론 논의를 되살리고자 했다.

그가 활동하고 있는 사회진보연대가 최근에 내놓은 <한미 FTA 이미 실패한 미래> 또한 필자는 저자가 강단좌파로서는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본다.

저자가 사회운동을 정당권력쟁취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저자가 말하듯이 다분히 "전술적"인 것이다. 이는 한미FTA에서 한때 진보 아우라가 씌워졌었던 노무현에 의한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 대추리 사태, 황우석 사태 그리고 한미FTA에서 보여준 독단적인 엘리트 정부집권 5년에 대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를 "국가권력의 장악에 대한 이러한 과잉경계, 또는 현실정치에의 개입에 대한 이런 거리두기는 혹 해방 이후 레드콤플렉스와 함께 한국사회에 고질적으로 남아있는 현실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본의는 아니겠으나 기득권세력이 퍽 좋아할) 같은 것은 아닐까"라며 레드 콤플렉스로까지 소급하고 있다. 이러한 풍부한 역사적 추리력과 무책임적인 비판이야 말로 세계체계 논의에 냉소주의를 확산시키는 것이 아닐까. 백승욱이 '전술'임을 언급했을 때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대안부재를 비판하면서 백승욱이 경비업체의 출현을 국가붕괴의 여러 징후 중 하나로 언급한 것을 "몇 가지 사물의 스케치"라며 확대의 오류로 비판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김윤자의 논법은 앞서서는 대안이 없다고 백승욱을 질타하고, 한편으로는 대안제시를 위한 미래예측으로써 백승욱이 조금 멀리 내다보고(남미의 입장에서는 현재적 상황이겠지만) 국가붕괴의 징후를 논한 것을 확대의 오류라고 비판한다면 백승욱은 대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나조차도 난감하다.

그렇다면 백승욱이 아니더라도 대안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 가보자. 세계체계논의에서 대안을 찾아보자면 최근에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반세계화 운동가인 죠지 몬비오(George Monbiot)의 <도둑맞은 세계화 'A Manifesto for a New Order'>(2006, 창비)에서는 유엔의 대안으로 세계의회를, IMF와 IBRD의 대안으로 국제청산연맹, 공정무역기구를 단순한 청사진 수준이 아닌 논리적 설득력에 의거하여 제시하고 있다. 국가단위로 들어가서 대안이 있는가를 본다면 김형기 교수의 '대안적 발전 모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새사연 모델' 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된 바 있다.

백승욱의 몫이기도 하지만 죠지 몬비오가 제시한 대안에 대해서 서구 대다수 언론의 외면뿐만 아니라 또한 국내 대다수 언론을 장악하는 보수언론 또한 진보진영의 설득력 있는 대안모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론화 하지 않고 '대안 없는 비판을 하는 진보'라는 레테르를 계속 붙이고, 한미FTA 체결만이 희망이라고 보도하는 행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김윤자의 촌평 제목처럼 '어떻게 전망의 통찰을 확보할 것인가'는 기존의 제출된 대안모델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면 좀 더 현실에서 유효한 접근이지 않을까. 동아시아 관점의 세계체계론에서 19세기 이전에 일본이 중국보다 경제적으로 앞선다는 스기하라의 주장에 대한 포메란츠와의 논쟁이 내셔널리즘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더라도, 지금까지 그런 논쟁이 없었던 한국에서는 필요한 논쟁이다.(강성호, 2006) 이러한 논쟁의 활성화를 위해서 김윤자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언론이라는 '장애물'에 대한 비판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사회진보연대를 통한 백승욱의 활동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대안이 없다는 김윤자의 비판은 과잉비판이었다.

대안이 없다는 것은 과잉비판

서평의 마지막 단락에 김윤자는 정성진이 <진보평론>에 기고한 논문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세계체계론의 유의사항을 언급하는데 사실 세계체계론이 사회구성체론 논쟁의 성숙기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세계체계론이 담론주도를 했었던 주변부 자본주의론과 싸잡아 동급취급을 받아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애쉬 아민으로 대표되는 <주변부 자본주의론>을 국내 번역 소개한 학자가 누구인가. 바로 정성진이었다.

주변부 자본주의론 이후에 정성진의 학문적 변화를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세계체계론의 사회분석은 분석단위가 세계체계이기 때문에 일견 거창하게 보여도 실은 단순한 평면적 분석"이라는 정성진이 진술한 일부만을 따와서 자신의 비판적 시각에 원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러한 원용은 정성진에게 주변부 자본주의론을 본격 소개한 당사자로서 (자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주변부 자본주의론과 함께 파묻히게 된 세계체계론을 다시 살리려고 하는 백승욱을 비판하는데 인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김윤자는 서평의 마무리에 "저자의 분발과 다음의 연구성과를 기대해본다"고 했는데 기자가 본문에서 지적한 사항 또한 동일하다. 한미FTA 체결 이후에 서민의 숨은 더욱 갑갑해지지만 우물 안 개구리로 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 독자들에게 본서의 일독을 적극 권하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스트플랫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지음, 그린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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