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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매실농원
청매실농원 ⓒ 박옥경
백일장은 오후 2시부터 시작이었지만 나처럼 조바심 많은 친구들이 있는 학교에서는 벌써 선생님이 아이들을 인솔하여 도착해 있었다. 미리 나가 계시던 광양문인협회지부장님 혼자 바쁘셨다. 미안한 마음에 얼른 자리를 잡고 펜이며 종이를 나누어주고 시제를 이야기 해 주었다.

백일장은 점점 열기를 더해 가는데 올해 처음으로 매화 밭에 온 나는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농원 초입부터 매화는 그 고아한 자태를 이미 잃고 지저분하게 지고 있는 것들이 태반이었지만 '매화는 매화다'는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향기는 그야말로 우아하게 내 영혼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청매실농원의 장독대
청매실농원의 장독대 ⓒ 박옥경
향기조차 사라지기 전에 나는 매화 향에 몸을 싣고 둥실둥실 떠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발바닥이 간질거렸던 것이다. 같이 있던 회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빌려온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여기 저기 구경 길에 나섰다.

매화가 만개했을 때 앞다투어 실리던 기사들이 생각났다. 무엇이나 다 그런 모양이다. 화려함의 극치를 이룰 때는 눈길을 끌지만 퇴색하고 저물어가는 것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저물어가는 것들은 화려한 시절을 지나온 터이므로 성숙의 길로 접어드는 조락의 시간이 오히려 자랑스러울 것이다.

동백이 섬뜩한 핏빛이다
동백이 섬뜩한 핏빛이다 ⓒ 박옥경
청매실 동산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동백이 붉디붉은 모습으로 줄을 서 있었다. 지저분하게 지고 있는 매화와 대조되는 그 빛깔이 어찌나 선명한지 오히려 섬뜩하였다. 길 왼쪽에는 신기하게도 아직 꽃잎을 터뜨리지 않은 청매화가 봉긋봉긋 맺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꽃잎 속에서 섬진강물과 햇빛을 한꺼번에 까르르 쏟아내며 웃을 것 같았다.

피지 않은 매화, 만개한 매화, 지는 매화, 그 꽃그늘 아래 글짓기하는 아이들
피지 않은 매화, 만개한 매화, 지는 매화, 그 꽃그늘 아래 글짓기하는 아이들 ⓒ 박옥경
지는 꽃과 만개한 꽃과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들이 어울려 청매실 농원은 좀 희한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매화 꽃가지 아래 백일장에 참가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열심히 생각을 종이에 옮기고 있었고 응원차 따라 온 학부형이 잠든 어린 아이를 무릎에 앉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없이 정겨워 보였다.

대나무의 의지
대나무의 의지 ⓒ 박옥경
매실 동산 뒤쪽으로 가면 대나무밭이 있다. 영화 <취화선>을 찍은 곳인데 대나무 한 가지가 기역자로 꺾여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꺾였다고 굴복할 내가 아니라는 듯 싱싱한 잎을 달고 당당하게 바람을 맞고 있었다.

또 갈라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대나무도 있었는데 그깟 것 별거 아니라는 듯 휙휙 바람이 불때마다 휘파람 소리만 낸다. 아등바등 매일 전쟁터인 우리네 삶도 저렇게 여유롭고 태평스러웠으면 좋겠다.

나무둥치에 얹은 염원
나무둥치에 얹은 염원 ⓒ 박옥경
대나무밭 맞은편에는 둥치만 남은 나무가 있는데 무슨 소원들이 그리 많은지 돌멩이를 수북이 쌓아 놓았다. 돌멩이 하나마다 소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절에 가면 이렇게 돌탑을 쌓아놓은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지만 말라죽은 나무 둥치에 얹은 저 염원들은 다 어떻게 세상을 이루어갈지 가슴이 싸하다.

대나무밭을 돌아 내려오면 드라마 <다모>를 찍은 세트장을 만난다. 이곳은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다모>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의상을 빌려 입고 기념촬영을 할 수 있어서 연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곳이다. 둘러친 돌담을 배경으로 매화밭을 수놓은 초록의 풀이 아름다움에 한 몫을 더한다.

'다모'촬영지
'다모'촬영지 ⓒ 박옥경
세트장 앞의 작은 절구통에는 물이 고여 있고 바람에 날리는 매화꽃잎이 다복이 내려 앉아 있다. 정말 운치 있는 풍경이다. 매화꽃잎을 술잔에 넣어 마신다든지, 찻물에 띄워 마신다든지 하는 짓거리를 잘 하는 나는 어쨌든 물에 뜬 매화꽃잎이 그렇게도 매혹적일 수가 없다.

절구통에 뜬 매화꽃잎,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져 떠다닌다
절구통에 뜬 매화꽃잎,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져 떠다닌다 ⓒ 박옥경

다기에 띄운 매화꽃잎
다기에 띄운 매화꽃잎 ⓒ 박옥경
볕이 잘 드는 곳에는 진달래가 피었고 목련도 피었다. 그러나 매화 향기는 따라갈 수 없다. 비록 치부를 드러내는 듯 누렇게 퇴색되어가고 있지만 곧 튼실한 열매를 조록조록 달 것이고 매실농원은 또 한 번 초록의 잔치로 시끌벅적할 것이다.

유유자적한 섬진강
유유자적한 섬진강 ⓒ 박옥경
저물어가는 것들에 대한 사색을 하며 매화향기에 한껏 취해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은 변함없이 유유자적하다. 디지털카메라의 배터리가 다 되어서 미처 찍지 못한 모습들이 아쉽게 가슴 한 편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뭐, 어떠랴. 저 강물처럼 나도 유유자적하게 오늘을 마무리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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