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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와 함께 밭일을 하니 힘든것도 모르겠다며 신이 나신 부모님
손자와 함께 밭일을 하니 힘든것도 모르겠다며 신이 나신 부모님 ⓒ 김혜원
지독하던 꽃샘추위도 지나가고 어느새 얼었던 땅 위에서 연초록의 싹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봄이 되었습니다. 얼었던 땅이 녹고 성급한 목련이 꽃봉오리를 부풀리자 추운 겨울 동안 꼼짝없이 움츠려 지낼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들 마음도 급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첫 새벽부터 뒷산 텃밭을 오르내리시는 부모님에게 지난 겨울은 너무나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던 모양입니다.

"땅 냄새를 못 맡았더니 얼마나 답답하고 죽겠던지. 밭에 가보니 어느새 쑥들이 올라오고 봄기운이 가득하더라."
"지난번에 장에 가서 씨앗들은 다 사다 놓았고 이제 비료랑 거름만 들이면 돼."
"아부지랑 나랑 밭을 뒤집을 테니 너는 차 가지고 가서 거름 좀 사오거라."

식전부터 밭에 올라가 허기가 져서야 아침을 드시러 내려오시는 부모님. 아무리 손바닥만한 밭이라지만 두 분 다 칠순을 넘기신 노인이라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른 체력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냥 사다 드세요. 얼마나 싸게 먹자고 힘들게 밭일을 하세요."
"모르는 소리 하고 있다. 싸게만 먹자고 하냐? 내 손으로 깨끗하게 기른 좋은 채소를 먹자는 거지. 밭일이 힘이 들긴 하지만 흙을 밟고, 흙 냄새를 맡고, 흙을 만지다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지 아냐? 시멘트바닥 밟는 거에 댈 게 아니야."
"그럼, 새순 나올 때 봐라. 얼마나 이쁜지. 자식 키우는 재미 이상 간다."

이쯤되면 부창부수입니다. 겨우내 봄이 오기만을 기다린 두 분에게 밭을 일구는 재미를 빼앗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장난감을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도와드리지 못할 바엔 공연한 잔소리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요.

그러던 중 지난 금요일 군에 간 작은 아들이 3박4일의 외박을 받아 집에 왔답니다. 설을 함께 지내지 못해 마음이 아팠던 차에 외박을 나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얼마나 반갑고 기다려지던지요.

손주와 할아버지는 밭을 뒤집고 할머니는 거름을 올립니다
손주와 할아버지는 밭을 뒤집고 할머니는 거름을 올립니다 ⓒ 김혜원
하지만 아들이 집에 오던 날. 엄마인 저보다 제 아들을 더 기다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아이구, 우리 손자 왔구나. 할머니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허허허, 용석이 보니 마음이 다 든든하다. 할아버지도 우리 손자가 많이 보고 싶었어."
"할아버지 할머니 쑥스럽게 왜 그러세요. 늦었지만 새배부터 받으세요."
"쑥스럽긴. 할미 할애비가 손자 보고 싶다는 게 뭐 이상한 일이냐. 하하하."

물론 두 분이 손자를 무척 사랑하시는 것은 평소에도 잘 알고 있었지만 전에 비해 더욱 반가워하시는 모습에 아들도 새삼스럽다는 듯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외박 나온 손주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신 부모님은 저녁 식탁에서 연신 구운 고기를 손자 녀석 수저 위에 올려주시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그려 많이 먹어. 군인이 이 정도는 먹어야지. 많이 먹고 할머니 부탁 좀 들어줘."
"부탁이요? 할머니 뭐 무거운 거 옮길 일 있으세요? 걱정 마세요. 제가 저녁 먹고 해 드릴게요. 저 힘 세요. 대한민국 공군이잖아요."
"암만 암만. 하지만 오늘 말고. 오늘은 자고 내일 하자. 저 산 위에 밭 있지? 온 김에 그거 조금만 뒤집어 주면 돼. 거름이랑 비료랑 좀 올려다주고. 밭도 얼마 안돼. 아주 쬐끔이야."
"그래 용석아. 할아버지랑 같이 할머니 밭일 하는 거 좀 도와드리자."

손바닥만한 밭치고는 조금 크지요?
손바닥만한 밭치고는 조금 크지요? ⓒ 김혜원
알고 보니 두 분이 손주를 그렇게 기다리신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부터 두 분은 신이 났습니다. 장정 일꾼 하나가 생겼으니 얼른 밭으로 나가고 싶으신 것이지요.

"용석아 올라 가자. 밭이 손바닥만 해서 한나절이면 끝나. 끝내 놓고 고기 구워 먹자."
"걱정마세요. 어떻게 하는 건지만 알려주시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쉬세요. 제가 다 해드리고 갈게요."

그렇게 세 식구가 밭으로 올라간 지 다섯 시간째. 점심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밭으로 올라가보니 땀을 뻘뻘 흘려가며 밭을 일구느라 정신들이 없습니다.

"이제 좀 쉬시고 점심 드시고 하세요. 애도 배고프겠네."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냐? 하긴 나도 배가 고프긴 하다."

아마도 조금 남은 밭을 마저 뒤집고 내려오실 양으로 배고픈 것도 잊고 매달려 계셨던 모양입니다. 삽으로 흙을 파던 아들이 엄마를 보더니 어리광을 부립니다.

"엄마~ 나 죽어. 손바닥만하다더니 순전히 거짓말이야.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할머니 할아버지 밭일 하지 말고 사다 드시라고 해. 그동안 이렇게 힘든 걸 하신 거야?"
"하하하. 거짓말이라고? 요게 손바닥이지 그럼 뭐냐? 이눔아. 지금까지 늘 이렇게 하고 살았다. 그래서 너 좋아하는 김치도 해다 주고 상추도 뽑아다 주고 그런 거야. 밭일 하는데 이렇게 힘든 줄 몰랐지? 농사란 게 다 이렇게 힘든 거야."
"그럼, 땅을 일구어 봐야 곡식 귀하고 음식 귀한 줄 아는 거여. 상추 한 잎 키울래도 이렇게 땀을 흘려야 하는데…. 아무튼 올해는 우리 손자가 도와줘서 한결 수월했어. 젊은 땀이 들어갔으니 우리 집 밭농사 대풍날 거여."

밭 한쪽에선 지난해 심었던 파들이 파랗게 자라났습니다
밭 한쪽에선 지난해 심었던 파들이 파랗게 자라났습니다 ⓒ 김혜원
겨우 밭을 뒤집어 놓고 귀대하는 아들이지만 다음 외박을 나올 때 쯤이면 온 가족이 제가 일구어 놓은 밭에서 자란 상추에 쌈을 싸먹을 거라며 생색을 냅니다. 손주의 생색이 귀여우신지 연신 웃고 있던 부모님이 칭찬 한 보따리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려, 우리 손주가 큰 농사지었다. 우리 손주가 밭을 일구어 줘서 올해 농사 대풍 난다니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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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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