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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는 길 밭둑에 있는 원추리. 원추리는 꽃이 아름답지만 봄나물로도 맛있다. 그런데 첫 순은 누가 이미 따간 모양이다
ⓒ 정판수
@BRI@전국화된 속담이라기엔 좀 부족하지만 적어도 경상도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속담 중에 '정구지 첫순은 사위에게도 안 준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정구지(부추)의 첫 순은 자양강장제로 탁월하여 남편에게 줬으면 줬지 사위에게 주기엔 좀 아깝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이른 봄에 먹으면 몸에 좋은 첫 순이 어찌 정구지뿐일까? 이즈음의 들과 산에 나는 봄나물의 첫 순은 다 보약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겨울을 이겨내고 이제 갓 촉만 내민 그 작은 모타리에 자연이 선물을 주지 않을 수 있으랴.

도시 산다고 하여 늘 행복하지는 않을 게다. 마찬가지로 시골 산다고 하여 늘 행복하지도 않다. 그래도 이즈음의 시골 생활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봄나물 첫 순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18일) 모처럼 짬을 내 들길 산길을 싸돌아다녔다. 새벽녘 잠깐 스쳐간 눈바람의 영향 때문인지 찬기가 느껴졌지만 그 정도로 봄 내음 맡기를 단념할 수 있으리. 산과 들이 풀빛으로 물들었다 하기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제법 솟아난 파릇파릇한 풀빛이 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는 순간 그 향기가 코로 들어온다.

봄 내음에 취해 저절로 발길 가는 데로 맡겨 길을 가는데 밭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원추리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첫 순을 누가 베어간 모양인지 처삼촌 묘소에 벌초한 것처럼 듬성듬성 뜯겨 있다.

▲ 우리 부부가 나물밭이라 명명한 곳에 있는 쑥들. 작년에는 쑥밭이었는데 올해는 그 이름을 붙이기엔 좀 부족하다
ⓒ 정판수
다시 걸음을 옮기니 이번엔 길가에 돌냉이(돌나물) 일가가 소복이 모여 있다. 누구의 손을 닿은 적 없는 첫 순의 돌냉이였다. 돌냉이는 물김치로 담아 먹어도 맛있지만 나는 양념장 만들어 비벼먹는 걸 더 좋아한다. 돌냉이 특유의 맛이 그대로 살아나기에.

봄나들이가 원래 목적이지만 봄나물을 본 김에 그 향취를 만끽할 작정으로 우리 부부가 명명해 놓은 나물 밭으로 갔다. 그곳은 백토광산 올라가는 길목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밭이다. 거긴 몇 년 전 울산 사람이 사놓고 경작을 하다가 재작년부터 묵혀둔 곳이다.

작년 봄 우연히 들렀다가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터뜨렸다. 봄나물이 정말 무더기로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먼저 쓸어갔는지 작년에 비할 바 못 됐다. 그래도 쑥이랑 나생이(냉이)랑 달롱개(달래)가 심심찮게 보인다. 호미 대신 쓸 게 있는가 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쇠꼬챙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 나들이갔다 내려오는 길에 발견한 돌미나리밭. 저녁에 무쳐 먹다.
ⓒ 정판수
나생이는 코로 먹고, 달롱개는 눈으로 먹고, 쑥은 입으로 먹는다는 말처럼 캐려고 고개를 숙이니 나생이의 향기가 가장 진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연초록의 대궁이 아래로 내려와선 하얗게 복스런 몸뚱아리를 이룬 달롱개는 언제 봐도 예쁘다. 쑥이야 너무 흔해 그 가치가 덜하지만 그래도 이즈음의 입맛을 살려내는 게 쑥국만한 게 있을까?

내리막길 개울가에서 돌미나리란 보물을 만난 건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아마도 미나리 종자가 어떤 연유로 옮겨와 자랐는데 물이 공급되지 않다 보니 돌미나리가 되었으리라. 살짝 씹어보았다. 약간의 쓴맛과 짙은 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오늘 저녁 밥상에 당연히 돌미나리무침이 오르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갓집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께서 뭔가를 다듬고 있어 잠시 눈을 주니 봄나물이었다. 인사 겸 들러 둘러보니 세상에 어디서 얼마나 애써 뜯었는지 대야에 가득했다.

아까 본 원추리를 비롯하여 어린 머위 잎사귀도 보이고, 부지깽이 나물에다 눈 뜨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던 취나물도 보인다. 다듬는 모양이 아마도 장에가 팔려는 것 같아 슬쩍 여쭤보았다. 한 소쿠리에 얼마쯤 받을 거냐고.

2000원쯤 받을 생각이란다. 2000원이라니? 3, 4월 지천으로 깔렸을 때야 한 시간만 훑어도 한 자루가 되지만 아직 철 이른 시기에 그만큼의 나물을 뜯으려면 얼마나 애써야 하는지 잘 알기에 잠시 놀라며 너무 헐하지 않느냐니까, "키운 것도 아니고 산과 들에서 그저 주웠는데 그만큼 받아도 고맙지요" 하신다.

이곳 달내마을에 산 지 2년이 다 됐음에도 마을 어른들의 행동을 난 아직 이해 못할 때가 많다. 아니 이해 못한다고 하기보다 좁은 소견으로 넘어설 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분명히 나보다 적게 배웠음에도 마음 씀은 훨씬 더 넓다. 사람됨은 역시 가방 끈으로는 잴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씨 뿌리고 거름 주고 물 줘서 키운 것도 아니기에 그리 욕심낼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그 경지에 오르려면 얼마나 더 배우고 더 생각해야 할까? 아니 어쩌면 이미 속물화된 나로선 영원히 그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뿌듯한 마음에 돌아보니 할머니의 등 뒤로 마지막 조금 남은 햇살이 내리 비치고 있었다.

▲ 길가 할머니가 팔려고 다듬어놓은 나물들. 왼쪽은 원추리, 부지깽이, 머위, 취나물이 섞여 있고, 오른쪽은 돌냉이다. 둘 다 2000원 받을 거란다
ⓒ 정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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