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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가르에 있는 동안 숙소로 정한 셔만호텔. 19세기 러시아 영사관이었던 곳으로 지금 치니바그 호텔로 쓰이는 영국의 영사관과 더불어 영・러 냉전체제하의 중앙아시아 패권다툼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곳이다
카슈가르에 있는 동안 숙소로 정한 셔만호텔. 19세기 러시아 영사관이었던 곳으로 지금 치니바그 호텔로 쓰이는 영국의 영사관과 더불어 영・러 냉전체제하의 중앙아시아 패권다툼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곳이다 ⓒ 오창학
카슈가르에 오면 꼭 머물고 싶은 곳이 있었다. 지금은 치니바그 호텔의 고급레스토랑이 된 영국영사관 건물과 셔만 호텔의 민속춤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는 옛 러시아 영사관이 바로 그곳이다. 때문에 여기 셔만 호텔(色滿賓館)을 미리 예약했었다.

19세기 러시아의 남하와 영국의 북진 정책 사이 대립은 흡사 과거 미소 냉전체제를 방불케 할 만큼 살벌했다. 흑해의 크림반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거대한 전선이 형성되었는데, 1885년 영국함대가 우리나라 거문도를 무단 점령한 것도 이런 냉전의 산물이었다.

호텔 내부의 그림 전시 판매대
호텔 내부의 그림 전시 판매대 ⓒ 오창학
말이 영사관이지 합법적 외교기구를 통해 청의 신장진출을 견제하려는 러시아와 이런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신장 지역 무단 점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신장 내에서 러시아와 영국 영사관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필요하면 어디든 점령하고 보는 강대국 깡패근성은 미국이 잘 대물림해 쓰고 있다.

1908년 일본 오타니 고즈이 백작의 西本願寺(서본원사)에서 파견된 두 명의 학승이 불교 전래 경로를 탐사할 목적으로 신장, 즉 중국령 중앙아시아에 발을 디뎠을 때 이들에 대한 첩보가 즉각 영국과 러시아 영사관에 수집되었다. 1902년에 파견된 오타니의 1차 탐험대는 그 존재조차 인식되지 않았으나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명실공히 아시아의 열강으로 떠오른 뒤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이 각 오아시스마다 심어놓은 인도 상인들의 조직망 악사칼(흰수염이라는 의미로 '장로'를 뜻함)들이 수 주일 동안 일본 탐험대를 미행하며 감시했다. 러시아 영사관에선 그들 중 타치바나 즈이초는 일본 해군장교이이고 노무라 에자이부로는 육군 장교라는 정보를 영국에 넘겨준다.

이후 이들이 고고학자인 동시에 일본의 정보조직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을 내린 영국 정보부는 동경주재 영국대사를 통해 외교적 경고를 보냈지만 외무대신 코무라 백작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들에게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이거야 말로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정보요원의 스파이 행위가 밝혀졌을 때 정부가 '그들에게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방법. 100년을 넘게 내려온 역사적 전통이었을 줄이야.

이제 그 역사 속 장소들은 여행자를 위한 숙소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곳에 묵는 사람들 중 몇이 당시의 치열했던 열강 사이 암투를 기억할 수 있을까.

독일의 실크로드 여행 트럭(위), 셔만 호텔의 전통 가무단(아래)
독일의 실크로드 여행 트럭(위), 셔만 호텔의 전통 가무단(아래) ⓒ 오창학
여기 셔만 호텔에선 새로운 단체객이 올 때 전통악기 연주와 춤으로 환대한다. 물론 우리를 위한 연주는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정겹고 반가운 느낌이다. 숙소 마당에 독일여행자들의 트럭이 있다.

벤츠의 트럭을 토대로 장거리 캠핑 여행이 가능하도록 개조한 차량이다. 20여 명 가까이 되는 단체객이 항공편으로 우루무치에 닿으면 이 차로 실크로드 육로를 운행한다. 많은 시간을 요해서인지 대개 60~70대 노년층으로 여행단이 구성되어 있다.

첫 여행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차후에 있을 내 자동차 지구여행에 불을 지피는 순간이다. 더 늙기 전에 실행해 봐야지. 한반도에서 육로를 통해 대륙의 끝까지 여행해 볼 테다. 트럭에 다 같이 타서 다니는 것 말고 내 아내와 둘이서 내 차로.

긴 마라톤의 반환점에 서다

어제의 늦은 취침 탓에 오전 11시가 다 되도록 늑장을 부린다. 여행도 일과 마찬가지여서 일주일에 하루는 휴식을 취하는 일정으로 잡아야 하는데 내겐 카슈가르가 그런 곳이다. 과거 대상들이 가진 숨고르기의 역사적 의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거리로 보나 의미로 보나 우리 여행의 반환점을 기록하는 곳이다. 비록 지나온 길을 다시 밟아가는 과정은 아니지만 여기 이후로의 여정은 소위 '귀로'가 될 것이다.

2호차 팀은 사륜구동을 임대하여 오늘 타쉬구얼간에 오르려 한다. 우리 1호차는 하루를 더 머문 후에 예정대로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길(오아시스 남로)을 관통해 아얼진을 넘게 될 것이다. 숙소에서 개인정비와 2호차 팀의 출정이 준비되는 사이 나와 철봉씨는 백구의 정비를 위해 수리창(정비소)을 찾아 나섰다.

어제 야간 주행 중 손상된 옆거울과 돌을 뭉개 의심스러운 하체부위를 점검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7000Km를 넘게 달려온 시점에서 한 번쯤 정밀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인구 35만이 거주하는 타클라마칸 최대 도시답게 맞춤한 정비소가 있다.

카슈가르의 정비공들, 백구를 만지다

정비소의 전직원이 백구에 매달린다. 내겐 여러 차례 겪는 풍경이지만 그들에겐 흔치않은 구경일 것이다
정비소의 전직원이 백구에 매달린다. 내겐 여러 차례 겪는 풍경이지만 그들에겐 흔치않은 구경일 것이다 ⓒ 오창학
정비소 입구로 차를 몰아 들어가니 언제나 보아왔던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게 뭐야 하는 표정으로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백구 주변에 포진. 이리저리 살피고 차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고…. 한국의 인천에서 출발해 톈진에서부터 달려왔다 하니 경탄의 눈길을 보낸다.

옆 거울 하나를 부착하는데 정비소 사장님이 직접 나섰고 거의 전직원이 참관. 10대 소년도 몇 보인다. 이 중 대부분은 일종의 견습생으로 임금 없이 배우는 사람일 게다.

당연히 무쏘스포츠의 옆거울에 딱 맞는 부품이 있을 리 없다. 다른 차량의 거울을 집어넣고 접착제로 붙여버리는 응급처치를 했다. 그래도 한쪽 눈이 감겼다 떠진 것처럼 후련하다. 유리닦이물과 부동액도 보충했다.

이번 여행의 성과라면 사소한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은 점이라고나 할까. 사막의 먼지가 유리에 붙을 때 이 한 방울의 유리닦이물이 없다면 얼마마다 한 번씩 내려 걸레질을 해야 한다. 생수를 넣어 사용하던 터에 꽉 채운 한 통의 유리닦이물은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정비소에서의 차량 점검. 카슈가르의 정비소.
정비소에서의 차량 점검. 카슈가르의 정비소. ⓒ 오창학
하체를 점검해보니 다행히 파손되거나 의심되는 부위는 없다. 어젯밤의 충격에도, 그간의 험난한 길에도 잘 견뎌 준 것이다. 그런데 뒷바퀴 기어통에서 누유증상이 보인다. 파손에 의한 충격은 아니고 단지 조금 새는 것이니 조치를 하겠다 한다.

기어통 뚜껑을 따서 내부의 오일을 대야에 받은 후 뚜껑부위에 장판 같은 판을 대서 오린 후 접착하더니 다시 조립하고 꺼냈던 오일을 넣는다. 일종의 장판 개스킷인 셈. 그런데 어지간하면 오일을 새 것으로 넣지 꺼낸 오일을 다시 넣는담.

엔진오일이야 합성오일이니 큰 염려 없이 버틴다지만 아얼진을 넘기 전에 교체하려 했던 공기정화 필터와 오일 필터는 하미의 2호차에 실어 둔 탓에 교체할 수 없게 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별 수 없이 공기정화필터나 한 번 더 꺼내어 털어냈다.

반환점이라서일까? 이제 본격적인 사막 남쪽의 길과 아얼진 산을 남겨두고 있어서인가. 차량정비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 정비소 내 세차장에 백구를 맡겼다. 위구르 아주머니 한 분이 세차를 한다. 굳은살 가득한 맨발에 치마의 허리를 드러내며 세차에 열중하는 아낙의 모습에 찡한 마음이 인다. 참 숱하게 겪은 궁핍의 흔적 앞에서 나는 지나가는 한 사람의 나그네다.

파미르 고원에 2호차 일행을 보내며

2시 40분. 2호차 일행은 타쉬구르칸으로 떠났다. 402년 승려 법현이 여길 넘고 "여름에도 눈이 덮여 있었고 독룡(毒龍)이 있어 한 번 노하면 눈과 비를 토하며 모래와 자갈이 날리므로 이를 만나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술회했던 땅. 인도 파키스탄 및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중요한 통로로 5000~7000m급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실크로드의 요충지.

이 고원지대 역시 꼭 답사하고 싶었던 곳이지만 주어진 일정 탓에 나는 예정된 길을 가야 한다. 결국 카슈가르에 다시 와야 할 핑계를 남겼다. 정말 다시 올 수 있을까? 한국과 3시간 시차가 나는 서역 땅까지 자동차로 달려오는 일이 다시 있을까?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두 번 움직이긴 어려운 길이다.

꺼지지 않는 위구르인의 희망, 향비묘

2호차 일행과는 뤄창, 혹은 란저우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우린 시앙페이무(香妃墓)라 불리는 아팍 호자의 묘당으로 향했다.

향비묘라 불리는 아팍 호자의 성묘
향비묘라 불리는 아팍 호자의 성묘 ⓒ 오창학
사진 속에서 눈이 아프도록 접했던 그 푸른 타일의 이슬람식 건축물이 눈앞에 서 있다. 현지인들은 '하즈라티(尊者)의 성묘' 혹은 '아팍 호자의 성묘'라 부르나 관광객에겐 시앙페이무, 즉 향비묘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청 건륭제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몸에서 향내가 나는 아팍 호자의 몇 대 손녀를 비로 취했다지. 그러나 향비는 비수를 가슴에 품고 절개를 지키다가 황제 모친의 강압에 자결(혹은 향수병으로 요절)하였단다.

이에 3년에 걸쳐 향비의 시신을 운구하여 이곳에 안치하였다는 것인데 5대 72구의 시신이 누운 관 중 그녀의 것도 표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200여 년 전 향비를 운구했다는 오래된 상여도 묘실 입구 왼편에 전시되어 있다.

베이징에서 카슈가르까지 향비를 운구했다는 상여. 실내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냥 조준 없이 한 컷
베이징에서 카슈가르까지 향비를 운구했다는 상여. 실내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냥 조준 없이 한 컷 ⓒ 오창학
그러나 건륭제의 후비들 중 위구르 출신 여인은 '용비(容妃)'뿐인데 그녀는 1758년 청의 신장 점령 시 정복을 도운 가문의 딸이다. 황제의 총애를 받다가 1788년 55세의 일기로 사망해 황제의 능침이 있는 허베이(河北)의 청동릉(淸東陵)에 묻혔다.

김호동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19세기 말까지 '향비'라는 인물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다가 이 무렵 신장에 파견된 한인들의 글에 향비가 등장하고 20세기에 들어 더욱 널리 퍼졌다고.

그리고 1858년 카슈가르를 방문한 여행자의 기록에서 그가 카슈가르에 닿기 2년 전 북경에 있는 호자 가문의 후손 시신이 카슈가르로 운구되어 아팍 호자의 성묘에 묻혔다는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건륭제 후비인 용비이야기와 시신운구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윤색되어 향비 설화가 생긴 것으로 본다.

결국 향비묘는 청에 정복당한 위구르인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대리만족 수단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카슈가르에 향비묘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때로 신념은 믿음을 만들고 믿음은 또다른 신념을 부르는 법. 위구르인들에게 향비 설화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

향비묘 뒤쪽의 묘지군. 여기에 19세기 위구르 독립정권을 세웠던 지도자 아쿱 벡의 무덤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향비묘 뒤쪽의 묘지군. 여기에 19세기 위구르 독립정권을 세웠던 지도자 아쿱 벡의 무덤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 오창학
중가르의 반란이 좌절되고 청에 복속된 이후에도 신장에 몇 차례의 봄은 있었다. 1864년부터 1876년까지 10년 남짓한 기간은 원주민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슬람교도들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봉기해 아쿱 벡을 구심으로 한 원주민 정부를 세웠다.

우수한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그의 병력은 한때 중국령 중앙아시아 전역을 휩쓸었으나 아쿱 벡의 어중간한 협상책 때문에 허를 찔리고 거기에 아쿱 벡의 돌연한 급사로 10년 독립국 시기는 막을 내린다.

아팍 호자의 성묘 뒤쪽에 있는 여러 무덤 중에 파헤쳐진 무덤이 하나 있는데 위구르 사람들은 그 무덤을 아쿱 벡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청군이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불태웠다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위구르인들의 좌절된 독립의지와 영광을 흔적을 부여잡기 위한 또 하나의 향비묘일 뿐이다.

향비묘 앞의 병 줍는 소녀. 어쩌면 향비는 이 소녀와 같은 모습이었을지도....
향비묘 앞의 병 줍는 소녀. 어쩌면 향비는 이 소녀와 같은 모습이었을지도.... ⓒ 오창학
향비에 관한 몇몇 초상화들이 존재하지만 모두 상상화에 불과하다. 향비묘 앞의 기념품 가게에 위구르 여인들을 강렬한 색채로 수놓은 수건들이 걸려 있다. 저들의 형상이 혹 향비가 아니었을까. 다른 한쪽 벽에 플라스틱 병을 줍는 위구르 소녀가 등을 기대고 있다. 순간 향비는 저 아이의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건륭제는 이국적인 여인의 향과 외모에 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카슈가르 인민광장의 마오 석상. 웅장하고 장엄한 그의 팔 아래로 카슈가르 사람들이 오간다. 여기도 어쩔 수 없는 중국의 영토였다
카슈가르 인민광장의 마오 석상. 웅장하고 장엄한 그의 팔 아래로 카슈가르 사람들이 오간다. 여기도 어쩔 수 없는 중국의 영토였다 ⓒ 오창학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인민광장 앞의 마오 석상과 오성 홍기를 봤다. 언어도, 사람도, 문화도 전혀 다른 이역의 땅을 복속시킨 탓에 중국정부의 부담이 더 컸던 것일까. 신장 지역의 모든 도시엔 '인민광장'이 있고 인민광장에 꼭 오성홍기와 더불어 마오의 석상이나 동상이 서 있는데 카슈가르의 것은 유독 크고 장엄하다.

하늘로 높게 든 마오의 팔 아래로 두건 쓴 위구르인들이 지난다. 멀리, 아주 멀리 다른 세상까지 달려왔다고 믿었지만 결국은 중국땅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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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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