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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반짝이는 금빛 억새밭의 풍경은 평화롭고 한가한 느낌을 준다.
햇살에 반짝이는 금빛 억새밭의 풍경은 평화롭고 한가한 느낌을 준다. ⓒ 김연옥
내게 있어 넉넉한 산은 팍팍하고 고달픈 삶을 잊게 하는 숨구멍 같은 것. 이따금 세상일로 울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거나 갑자기 내 모습이 초라하고 서글프게 느껴지면 나는 산으로 막 달려가고 싶어진다.

나는 지난 23일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밀양 재약산 사자봉(1189m)을 떠나는 산악회를 따라나섰다. 아침 8시에 마산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9시 40분께 석남터널 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과 산내면에 걸쳐 있는 재약산 사자봉은 영남알프스에 속하는 산이다. 영남알프스는 마치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경남 밀양시 산내면, 경북 청도군 운문면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에 모여 있는 일곱 개의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지산(1240m), 신불산(1208m), 재약산(1189m), 운문산(1188m), 간월산(1083m), 영축산(1059m), 고헌산(1032m)이며 그 높이가 모두 1천 미터가 넘는다.

아늑한 억새밭 풍경. 괜스레 사랑의 봄을 꿈꾸고 싶다.
아늑한 억새밭 풍경. 괜스레 사랑의 봄을 꿈꾸고 싶다. ⓒ 김연옥

앙상한 나무들과 어우러져 있던 억새풀의 풍경.
앙상한 나무들과 어우러져 있던 억새풀의 풍경. ⓒ 김연옥
10분 남짓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계속 부드러운 능선을 타게 된다. 드문드문 억새풀이 보이더니 갈수록 점점 더 많았다. 앙상한 나무들과 어우러져 있는 금빛 억새풀의 풍경은 한 폭의 예쁜 그림 같았다.

사랑의 봄을 꿈꾸고 싶은 아늑한 풍경이라고 할까. 잠시 편안한 기분에 젖어 그 길을 신나게 뛰어 보았다. 그리고 가끔 멋들어지게 생긴 소나무들도 내 발길을 붙잡았다.

능동산 정상.
능동산 정상. ⓒ 김연옥
10시 50분께 능동산(陵洞山, 982m) 정상에 이르렀다. 그저 평범한 곳이다. 나는 그곳에 잠시 앉아서 쉬고 있던 일행 두 분과 헤어져 곧장 재약산 사자봉을 향했다. 그 길에는 따뜻한 봄이 이미 성큼 다가와 있었다. 게다가 걸쳐 입은 두꺼운 옷을 벗어야 할 정도로 햇볕이 꽤 따갑게 쏟아져 내렸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억새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억새 하면 아마 은빛 물결로 굼실굼실 춤추는 가을 억새밭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사실 머릿속에 그저 그려 보기만 해도 행복한 풍경이다.

ⓒ 김연옥

억새밭에 누워 달콤한 봄꿈에 젖어 있고 싶다.
억새밭에 누워 달콤한 봄꿈에 젖어 있고 싶다. ⓒ 김연옥
그래도 이맘때 햇살에 반짝이는 금빛 억새밭의 풍경 또한 평화롭고 한가하여 좋다. 나는 넓디넓은 억새밭을 바라보자 문득 그 밭에 길게 누워 달콤한 봄꿈에 젖어 있고 싶었다. 느긋한 마음과 나른해진 몸으로 그저 강은교의 '사랑법'이나 읊으며 누워 있고 싶었다.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뒤에 있다.

- 강은교의 '사랑법' 일부


재약산 사자봉 정상에서. 천황산이란 이름을 언제까지 그대로 두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재약산 사자봉 정상에서. 천황산이란 이름을 언제까지 그대로 두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 김연옥
재약산 사자봉에 오른 시간은 낮 1시 10분께. 일제강점기에는 천황산이라 불렀다 한다. 그 후에 우리 산에 우리 이름을 되찾아 주는 운동이 전개되면서 산꾼들은 재약산 사자봉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정상 표지석에 천황산으로 표기되어 있는 사실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재약산 사자봉 정상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고 있는 등산객들.
재약산 사자봉 정상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고 있는 등산객들. ⓒ 김연옥
재약산(載藥山)은 신라 흥덕왕의 셋째 아들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흥덕왕 4년(829년)에 병에 걸린 왕자가 명산의 약수를 찾아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다 현재 표충사 자리에 있는 영정약수(靈井藥水)를 마시고 나았다 한다. 그 뒤로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거다.

그날 산행은 마침 시산제를 겸한 것이었다. 그래서 여느 산행과 달리 정상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모두들 군데군데 앉아 제사상에 올린 음식까지 곁들여 맛있게 도시락을 먹는 모습도 정겹게 와 닿았다.

사자봉 정상에서 하산하는 모습.
사자봉 정상에서 하산하는 모습. ⓒ 김연옥

ⓒ 김연옥
정상 일대는 거대한 암벽이 있어 거칠고 험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사자봉은 산세가 부드러운 산이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에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표충사로 하산하는 길에 반짝반짝 햇살 받은 금빛 억새밭이 또 내 마음을 흔들어댔다. 이제 내 마음밭에도 따스한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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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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