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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겉그림
ⓒ 랜덤하우스
누군가 여행은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옮기는 것이라 했다. 아무리 많은 곳을 여행했다 할지라도 자기 우물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만큼 여행은 장소보다도 자기 생각의 지평을 여는 게 훨씬 소중한 일이다.

신영복 교수의 서화에세이 <처음처럼>에서는 여행과 관련하여 또다른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여행에서 가장 먼 길은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 여행하는 것이란다. 그만큼 머리에서 깨달은 것을 가슴으로 잇는 게 쉽지 않고, 설령 가슴이 뜨거워졌을지라도 발끝에까지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그 까닭에 줄곧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면 희망의 연대이다. 이른바 우뚝 솟아 오른 한 그루의 나무보다는 오히려 그 나무를 지탱하는 흙가슴처럼,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라나 우거진 아름다운 숲들을 내다보게 하고 있다.

산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태양은 언제나 산에서 뜨고 산에서 진다. 바다에서 일평생 생활한 사람도 태양은 언제나 바다에서 뜨고 바다에서 진다. 넓은 평원에서 한 세월을 보낸 사람도 태양은 언제나 평원에서 뜨고 평원에서 진다. 가끔씩 이권 때문에 포용하지 못한 채 핏대를 세우며 다투는 사람들의 모습이 꼭 그런 주장이지 않나 싶다.

그러나 물은 다르다. 물은 산에서든지 바다에서든지 평원에서든지 매 한 가지다. 높은 데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물이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막힌 돌담을 부딪히지 않고 에돌아 간다. 분지가 있으면 가득 채운 후 부드럽게 지나간다. 그만큼 물은 생명의 삶이요, 관용의 삶이다. 그렇기에 썩지 않는 참 물이라면 그만큼 생명력은 긴 법이다.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주역 사상의 핵심입니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리게 되며, 열려 있으면 오래 간다는 뜻입니다."(171쪽)

이른바 물처럼 참됨을 갈구하면 모름지기 사람은 변할 수밖에 없고, 변하는 곳에는 열림이 있고, 열려 있으면 무엇보다 생명력이 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실 이 땅에서 폼 내고 주름잡은 것들이 몇 년 못 되어 사라진 예들은 참 많다. 모든 찬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다가도 하루 아침에 쇠한 것들이 너무 많다. 이념도 체제도, 그에 따른 운동도 다 그러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지구의 종말 앞에서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듯 꿋꿋하게 살아가면 된다. 그만큼 참됨의 씨앗을 뿌리면 된다. 그것을 신영복 교수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 이야기했다.

"무성한 잎사귀 죄다 떨구고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나목으로 서 있는 감나무는 비극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 가지 끝에서 빛나는 빨간 감 한 개는 '희망'입니다. 그 속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입니다."(229쪽)

그렇듯 참됨의 씨앗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짓밟을지라도 그 생명의 숨결은 끝내 솟아오르는 법이다. 세월의 여파 속에서 그리고 희망찬 열매도 내 놓는 법이다.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이룰 일은 아니다. 긴긴 세월 속에서 자기 이파리들을 떨어뜨리는 스스로의 죽음을 되풀이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아흔이 넘은 노인이 산 속의 돌을 캐내고 흙을 파서 삼태기로 발해까지 그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처럼….

사실 이 땅에서 참된 숲을 이루는 것은 쉽지 않다. 너도나도 빼어난 한 그루 나무처럼 우뚝 서길 바라는 까닭이다. 세상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 더군다나 혈연과 학연과 지연, 그리고 제도와 관습 등이 숲 속의 덫과 톱이 되어 그 정신과 삶을 마구 헤치고 있지 않던가?

그럴지라도 희망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모두를 이롭게 하는 참 물처럼, 그리고 참 씨앗처럼 궁극이 되는 참됨을 지향하고 변하고 열리고 포용하고 관용하면 그 생명력 자체가 길고 긴 희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뜻깊은 냉철한 생각을 머리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발끝까지 이어가는 참된 흙가슴으로 연이으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그 때에만 이 세상을 희망의 숲으로 일굴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처럼 - 신영복의 언약, 개정신판

신영복 글.그림, 돌베개(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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