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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알라딘
우리나라는 선진국대열로의 진입에 온통 힘을 쏟고 있다. 세계 자본을 많이 끌어들이고 있고, 값싼 노동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가 됐든 그 누가 됐던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미국이 주도하는 FTA 협상에 순순히 나서는 것도 그 흐름이다.

그러나 선진화대열에 발 벗고 나서는 동안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과연 나아졌는가? 돈줄이 있고, 배운 사람들이야 아는 곳에 발 빠르게 들어가고 투자하면 된다. 그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기에 그만큼 뒤처지고 있다. 농어촌에서 사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그저 세월과 함께 쇠꼴만 빠질 뿐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선진국을 이루는 길인가? 그저 잘 먹고 잘 쓰고 잘 사는 것만이 선진국인가? 겉으로는 자유로워도 속이 부정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마저도 선진국인가? 가난하더라도 모두가 잘 사는 길은 없을까? 못 먹고 못 입어도 서로를 위하며 서로가 믿어주는 그런 사회는 바랄 수 없는 것인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의 〈가난한 휴머니즘〉(2007·이후)은 비록 가난하지만 참된 인간애를 찾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는 프랑스와 맞선 전쟁에서 독립을 이뤄냈다. 하지만 악덕 뒤발리에 부자의 30년 세습으로 그곳의 사람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에 대해 반기를 들며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가 아리스티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신부로서, 그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참된 자유와 인권을 위한 애써왔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가 주도하는 내란에 휘말려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나라 바깥에서 지금도 아이티 공화국이 살 길이 무엇인지, 가난하지만 참된 신뢰가 존속하고, 그만큼 인간애가 회복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이 책에는 총 아홉 통의 편지가 담겨 있다. 물론 아이티 공화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쓴 글이지만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에 휘둘린 채 굽신거리며 사는 나라들, 비록 가난하지만 참된 인간애를 회복하려는 세계 모든 나라와 사람들을 위한 편지기도 하다.

“아이티 정부가 국제기구의 지시를 계속 따른다면 우리는 전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프로그램에 따라 그저 여기에서 저기로 맴돌 뿐,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반면 민중들에게 전략을 구하는 시민사회 사이에서 아이티의 조직들을 본다는 것은 한밤중에 촛불을 만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절망의 암흑에서 만난 희망! 우린 대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대안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를 굶주림에서 꺼내어 ‘존엄한 가난’으로는 이끌 것이라 봅니다.”(93쪽)

사실이 그러했다. 아이티가 가난하게 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식민통치를 해 왔던 프랑스가 주범이요, 현재는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미국주도의 외세자본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프랑스는 그곳의 열대우림을 마구잡이로 벌채하여 유럽에 값비싸게 팔아 넘겼고, 그로 인해 농민들의 소출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주도한 정책도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자본과 식량을 원조해 주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모든 힘줄을 끊어 놓았다. 시골 가구의 80%이상이 돼지를 기르며 학자금을 썼는데 그 숨통마저 끊어버렸고, 농업분야의 대출금도 전체의 2%만 쓸 수 있게 했다. 그들이 압력을 가한 식량수입정책으로 아이티의 농업생산성마저도 극심하게 떨어졌고, 학교라는 곳도 오직 돈줄이 있는 자식들이라야 들어가게 해 놓았다.

그런데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에서 피어날 수 있는 희망을 읊조리고 있다. 무엇이 그가 바라보는 희망이란 말인가? 무엇이 그 아이티 공화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경제적 자본이 아닌 신뢰적 자본에서 찾고 있다. 인간의 머리끝에 돈줄을 매달고 살면 절망하게 되고 자살이 넘쳐나겠지만, 비록 가난하더라도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제 3의 길을 만들어간다면 오히려 참된 인간애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신념을 잃지 않고 있다.

“우리 조합의 힘은 경제적 자본에 있지 않습니다. 그 힘은 바로 조합원들이 만들어가는 신뢰의 자본에서 나옵니다. 조합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투자하고 있으며, 세계 경제가 꺼리는 어떤 것에 투자하고 있습니다.”(117쪽)

그가 말하는 신뢰의 자본, 제 3의 길은 이 책 곳곳에 나와 있다. 다만 이 책의 가치는 단지 아이티 공화국의 미래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실상과 앞날을 들여다보는데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턱대고 우리가 선진화대열에 끼려고 안달할 게 아니라, 더디 가더라도 국내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더욱이 미국이 주도하는 종속경제에 질질 끌려 다니기보다는 조금은 힘들더라도 진정으로 서로가 신뢰하는 세상, 살맛나는 살가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제와는 다른 제3의 길을 터나가야 하지 않겠나 싶다.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이후(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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