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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근처 길가 텃밭에 핀 개불알풀
학교 근처 길가 텃밭에 핀 개불알풀 ⓒ 안준철
학교 근처에 텃밭이 하나 있습니다. 가끔 그곳을 지나다가 발걸음을 멈추곤 합니다. 밭도랑에 핀 들꽃들이 눈에 띈 까닭이지요. 입춘이 지나 햇살에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제 눈을 환하게 해주는 꽃이 있습니다. 개불알풀. 듣기가 좀 민망한 이름이지요. 그래서 여학생들에게는 땅비단이나 봄까치란 또 다른 이름으로 말해줍니다.

언젠가는 개불알풀이라는 본래의 이름도 함께 알려주었더니 한 아이가 그 이름이 더 정겹다고 하더군요. 뭔가 아는 녀석이다 싶었지요. 이런 아이들은 나이가 어려도 인생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만 하지요. 행복이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담임이 종례를 늦게 해주는 바람에 스쿨버스를 놓치고 다음 차를 기다리는 눈치가 보이면 이야기가 사뭇 길어지기도 합니다.

"꽃이 참 예쁘지?"
"예. 정말 예뻐요."
"왜 예쁠까?"
"예? 그야 예쁘니까 예쁘지요."
"그럼 개미 눈에도 저 꽃이 예뻐 보일까?"
"개미요? 호호, 잘 모르겠어요."

개불알풀
개불알풀 ⓒ 안준철

@BRI@개미 눈에 꽃이 예쁘게 보일지 어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개미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저는 질문을 던져놓고 아차 싶었습니다. 하마터면 우리 인간만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식별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뻔했으니까요.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을 짐작만으로 단정 짓는 것은 잘못이라 여겨 말을 이렇게 바꾸었지요.

"모든 사람들의 눈에 다 저 꽃이 예뻐 보일까?"
"그건 아닐 것 같아요."
"그렇겠지? 똑같은 꽃이라도 꽃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그럴 것 같아요."

"그럼 꽃이 예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누가 더 행복할까?"
"그야 꽃이 예쁜 사람이 더…."
"그럼 행복하려면 주변에 예쁜 것이 많아야겠네?"
"그렇겠죠?"

학교에 예쁜 아이들이 많으면 교사는 행복합니다. 이때 예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상에는 누가 보아도 예쁜 것이 있긴 합니다. 예쁨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도 감정을 지닌 사람인데 하는 짓이 예쁜 아이가 있고 미운 아이가 있게 마련이지요.

개불알풀
개불알풀 ⓒ 안준철
하지만 그런 기준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제 하굣길에 한 아이를 만났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를 많이 힘들게 했던 아이입니다. 솔직히 골라가며 미운 짓을 많이 했지요. 교사로서 위기의식을 느끼게 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그 아이가 참 예뻐 보였습니다. 이유도 없이 예뻐 보였습니다. 아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긴 있었지요.

저는 아직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잘 모릅니다. 철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어른이 다 되어버린 아이 같기도 합니다. 말투나 행동거지가 너무 거칠어 여학생다운 구석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어느 때 보면 누구 못지않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아이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를 과대평가해서는 곤란합니다. 녀석과의 평소 대화가 이런 식이었으니까요.

"공책 정리 않고 책상에 엎드려서 뭐 하는 거야?"
"저 지금 코딱지 파는데요."
"그래? 그럼 빨리 코딱지 파고 공책 정리해, 알았지?"
"…"

"코딱지 아직 다 안 판 거냐?"
"코딱지 파다가 피가 나서 닦고 있는데요."
"뭐야?"
"저 수돗가 좀 갔다 올게요."
"그러든지 말든지."

그래도 이런 대화가 오고 갈 때 만 해도 우린 사이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묘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으니까요. 제 안에 인내의 닻줄이 있다면 그것을 최대한 풀어놓고 아이를 기다리는 그런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한순간 인내의 긴장을 놓치고 만 것이지요. 그 아이의 멱살을 잡았다가 놓는 아주 짧은 순간에 저는 어떤 불행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아이는 노골적으로 수업을 훼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저는 그 아이를 교장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교장실로 들어가기 전에 아이를 복도에 세워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교사로서 제자에게 못할 짓을 했다. 너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넌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니 오늘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처벌을 받아야겠다. 그리고 너도 그동안 수업을 방해한 잘못에 대해서는 처벌을 받아야겠지. 그렇게 하자. 이대로는 도무지 안 되겠다."

개불알풀
개불알풀 ⓒ 안준철
그날은 제가 판정승을 했지만 아이의 진정한 변화가 없는 승부는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저와 그 아이로 인해 죄 없이 수업을 방해받고 있는 다수 아이들을 위한 작은 지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아침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문득 제 자신을 향해 이런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넌 그 아이를 사랑하니?" 저는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이런 억울함을 당하고도 미움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 대답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음 질문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넌 그 아이가 예쁘니?"

저는 그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한 사람을 예뻐하는 것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교사는 아이가 예뻐도 사랑해야 하고 예쁘지 않아도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그 아이가 때로는 예쁘지 않았지만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교장실 앞에서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널 미워하지 않아. 아니, 널 사랑해. 그것도 아주 많이."

개불알풀
개불알풀 ⓒ 안준철
그렇게 진실한 사랑을 고백했음에도 아이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것이 억울할 뿐이었는데 저는 기도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지요. 예뻐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정말 예쁜 것은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 저는 그 아이가 정말 예쁩니다. 오늘 오랜만에 운동장에서 만나 눈인사를 나누면서 그것을 다시 확인하기도 했지요.

그런 저의 마음을 아이는 알 턱이 없지만 크게 개의치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억울해 할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이지요. 지금도 어디선가 코딱지를 파고 있을지도 모를 귀엽고 예쁜 아이가 저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조금 보태고 손질하였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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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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