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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1330~1374년, 재위 1351~1374년)과 조선 중종(1488~1544년, 재위 1506~1544년)은 네가지 측면에서 권력적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첫째, 그들은 남의 도움에 힘입어 군주가 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원에 힘입었고, 중종은 반정세력(박원종·성희안 등)의 추대를 받았다. 둘째, 그들은 자신들의 킹메이커를 몰아내려 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와 친원파를 몰아내려 하였고, 중종은 반정세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BRI@셋째, 그들은 킹메이커를 몰아내기 위해 대리인을 내세웠다. 공민왕은 무명의 승려 신돈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었고, 중종은 무명의 선비 조광조에게 그러한 권력을 주었다. 넷째, 그들은 자신들의 '로봇'을 더 이상 통제하기가 힘들어지자, 애써 감았던 '태엽'을 도로 풀어 버렸다.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했고, 중종은 조광조를 사사(賜死)시켰다.

위와 같이, 공민왕과 중종은 반대파를 누르기 위해 한때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그 대리인의 힘이 너무 세지자 결국에는 대리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점에서 동일한 권력적 속성을 노출했다.

이들이 대리인을 내세운 데에는 중요한 권력적 속성이 작동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1299~1922년)의 군주인 술탄(sultān, 보통명사)이 궁정노예 출신의 대재상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시스템에서 그러한 속성을 엿볼 수 있다.

오스만제국사를 전공한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스즈키 다다시 교수의 논문인 '오스만제국에 있어서 지(知) 및 권력의 담당자와 정치과정의 변용'(オスマン帝國における知と權力の擔い手と政治過程の變容)*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권력 시스템을 살펴보기로 한다. 논문의 해당 부분을 발췌·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중반에 오스만제국에서는 군주전제적 정치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때 오스만제국의 정치는 어전회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군주전제적 정치 시스템이 구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술탄은 어전회의를 직접 주재하지 않았다. 대신, 대재상(大宰相)이라는 절대적 대리인을 앞세웠다.

술탄의 절대적 대리인인 대재상은 사실상 군주의 권력을 거의 그대로 행사했다. 그런데 그들은 특이한 신분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궁정노예 출신들이었다. 술탄에게 직접 예속된 노예들이었던 것이다. 군주가 노예 출신들을 전제정치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압바스왕조 이래 이슬람세계의 전통이었다. 오스만제국의 경우는 그 일례일 뿐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아무런 개인적 기반 없는 궁정노예들을 대재상에 앉힌 다음에 그들을 절대적 대리인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은 전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스즈키 다다시의 논문에 소개된 오스만제국의 권력 시스템은 한국적 전통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조선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은 외할머니가 승려와 노비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치유하기 힘든 정치적 콤플렉스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의 대재상들은 노예의 외증손자 정도가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노예였다. 이와 같이 15, 6세기의 오스만제국에서는 궁정노예를 총리로 활용하는 특이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나의 시스템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공민왕과 중종 시기에도 오스만제국과 유사한 권력 현상이 나타났다. 비록 궁정노예 출신은 아니지만,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없는 신돈과 조광조라는 인물이 한때 군주의 대리인으로서 사실상의 절대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군주의 대리인 즉 '또 다른 군주'가 출현하면 본래의 군주가 약화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15, 16세기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절대적 대리인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로 빠졌지만, 이 시기의 오스만제국은 군주전제적 국가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절대적 대리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술탄의 권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다. 공민광과 중종도 절대적 대리인을 내세웠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권력이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성격이 소심하거나 혹은 뭔가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공민왕과 중종은 왕권을 절대화하기 위하여 대리인을 앞에 세웠던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경우를 살펴볼 때,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절대적 대리인을 앞세우는 것이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첫째, 군주의 전제권력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제도적 규범으로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둘째, 절대적 대리인은 출신이나 조직기반이 미약한 자라야 한다. 셋째, 군주가 절대적 대리인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면, 군주가 절대적 대리인을 내세우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침해받지 않고 오히려 권력을 보다 더 극대화할 수 있다. 위의 조건들이 충족되면 절대적 대리인은 '로봇군주'처럼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군주권력이 두 명에 의해 분점되는 것처럼 보여서 본래의 군주가 약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리인이 원래 군주에게 종속된다는 조건이 지켜지면, 원래 군주는 '또 하나의 분신'을 갖는 셈이 된다. 군주가 또 하나의 분신을 갖게 되면 그 권력이 강화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두 명의 절대권력자'를 상대해야 하는 귀족이나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군주를 견제하기가 그만큼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의사와 의지가 서로 통하는 '두 명의 군주'가 권력을 행사함에 따라 군주의 전제정치는 그만큼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절대적 대리인 아니 로봇군주를 앞세워 전제정치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같은 배경 때문이었다. 오스만제국처럼 제도적으로 활용되지는 않았지만, 공민왕 및 중종 시기에 한반도에서도 이런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활용된 것은 바로 그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개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 점이 보다 더 명확해질 것이다. 개인이 다른 인격체에게 권한을 넘겨 주면 그 개인의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격이 없는 로봇을 하나 만든다면, 그 개인의 힘은 배가된다. 눈·귀·코·입과 팔다리가 하나씩 더 늘어나는 셈이다. 한편, 그 개인과 경쟁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 더 힘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만약 로봇이 주인의 통제에서 벗어나면 그때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이때 주인은 로봇을 없애려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별다른 정치적 기반 없이 친원파와 반정세력을 홀로 상대해야 했던 공민왕과 중종은 각각 신돈과 조광조를 로봇군주로 활용하여 '두 명의 절대권력자'를 출현시킴으로써 반대파들을 견제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로봇군주의 힘이 너무 강화되어 원래 군주의 조종을 벗어나게 되면, 그때는 더 이상 로봇군주가 아니라 치명적인 정적으로 돌변하게 된다. 원래 군주와 로봇군주의 분열은 반대파들에게는 숨통을 트여 주는 일인 동시에 원래 군주에게는 위협적인 일이 되고 만다.

공민왕과 중종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신돈과 조광조를 각각 죽인 시점이 바로 그때였다. 신돈과 조광조가 단순한 로봇군주에 머무는 게 아니라 독자적으로 '군림'할지도 모르게 된 시점에서 공민왕과 중종은 '태엽'을 얼른 풀어 버린 것이다. 태엽이 풀린 로봇은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 군주들의 속성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속는 척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돈과 조광조는 그런 '음흉한 군주'들을 믿고 이상주의 정치의 포부를 펼치고자 하였다. 독자적 기반 없이 남을 믿고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순수한 이상주의자인 신돈과 조광조에게 한때 '옥새'를 맡겼던 공민왕과 중종은 단지 소심해서 남을 앞세운 게 아니었다. 그들은 '또 하나의 로봇군주' '또 하나의 복제군주'를 창조하여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려 한 고도의 '정치기술자'들이었다. 오스만제국처럼 노예 재상제라는 시스템이 확립되지도 않은 고려와 조선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그런 기법을 잘 활용한 '정치인'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논문은 일본의 벤세이 출판사가 2001년에 발행한 이하라 히로시의 <지식인의 제상>(知識人の諸相) 129~141쪽에 실려 있다.
**이 점에 관하여는 도쿄대학 출판부가 1991년에 출판한 사토 스기타카의 <마물렉-이교의 세계에서 온 이슬람의 지배자들>(マムルーク――異教の世界からきたイスラムの支配者たち)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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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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