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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 요보비치를 세계적인 스타덤으로 만든 영화 <제5원소>는 감독 뤽 베송이 16세 때 구상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5원소'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제4원소까지는 잘 알려진 것들임에 비해 다섯 번째 원소는 뭔가 상당히 독특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잘 알려진 네 가지 원소는 바로 흙(earth), 공기(air), 불(fire), 물(water)이다.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인 엠페도클레스가 제안한 것이다. 탈레스나 아낙시메네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나 공기라고 한 것에 비하면 다소 복잡해졌지만, 그것이 하나가 아닌 넷이 됨으로 인해 후대의 글쟁이들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다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의 이전 소설인 <천사와 악마>에서는 이 순서대로 낙인이 찍힌 살인사건이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한 가지 원소에만 만족했었다면 댄 브라운도 아마 그런 식의 플롯을 채택하지는 않았을 게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더 이상 구체적일 수 없는 이 단순한 질문은 인류가 이 세상에 나서 자신과 주변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던져졌고 오늘날에도 이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 전세계적으로 수만 명의 과학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세상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와 '힘을 매개하는 입자',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의 입자들이 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는 다시 경입자(lepton)와 쿼크(quark)로 나뉜다. 쿼크는 자연계의 네 가지 힘인 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약력), 강한 핵력(강력)을 모두 느끼는 반면, 경입자는 강력을 느끼지 못한다.

경입자의 대표주자는 전자(e)와 전자형 중성미자(neutrino, ν)이다. 대개 이 둘을 짝지어서 (ν, e)라고 쓴다. 왜냐하면 약력에 대해 이 둘이 쌍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쿼크의 대표주자는 위(up, u) 쿼크와 아래(down, d) 쿼크이다. 이들 또한 (u, d)로 쌍을 이루어 약력에 반응한다. 경입자에는 (ν, e) 외에 이 사촌뻘 되는 쌍이 둘 더 있다. 쿼크 또한 (u, d)와 유사한 쌍이 둘 더 있다. 이를 한데 모으면 다음과 같다.

그림이 불러오는 의문... 그 해답을 찾아

▲ generation chart
ⓒ CERN

이 그림을 보는 여러분들 머릿속에서는 온갖 의문들이 물결치기 시작할 것이다. "왜 하필 세 쌍이야?", "왜 경입자는 강력을 못 느끼지?"라는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아니, 왜 이렇게 세상이 복잡해?"라는, 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아쉽지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수천 년에 걸쳐 그렇게 잘나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매달려 왔지만 첨단의 현대과학조차도 보통 사람들의 이 단순한 궁금증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에 비해 힘을 매개하는 입자에는 이러한 임의성이 비교적 덜한 편이다. 사실 현대물리이론의 가장 눈부신 성과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임의성을 줄인 것이다. 현대물리학은 상대성이론(relativity)과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라는 두 기둥 위에 구축된 초고층 빌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모든 입자들(전자나 쿼크나 중성미자 등등)은 파동과 유사한 에너지 다발로서의 '장'(field·場)으로 표현된다. 현대물리학의 가장 혁혁한 전과를 꼽으라면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각 힘을 느끼는 방식에 있어서의 '대칭성'(symmetry)을 발견한 것이다.

특히, 현재 우리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표준적인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standard model)은 게이지 대칭성(gauge symmetry)이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성질에 기반해 있다. 이를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 게이지 대칭성.
ⓒ 이종필

왼쪽 그림은 흔히 보는 파동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전자 같은 물질도 이런 파동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파동의 위상을 측정하는 가로축과 세로축은 우리가 임의로 그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축을 변화시켜 파동의 위상을 바꾸더라도 물리법칙은 바뀌지 말아야 한다. 오른쪽 그림과 같이 세로축을 옮기면 이에 따라 파동의 위상이 바뀌게 되는데, 이 효과를 상쇄시키려면 파동 자체를 그만큼 같이 옮기면 된다.

바로 이런 역할을 '힘을 매개하는 입자'들이 수행하게 된다. 여기에는 빛의 양자적 상태인 광자(photon), W, Z, 그리고 접착자(gluon)가 있다. W와 Z 입자는 약력을 매개하는 입자로서 광자의 사촌뻘 된다. 접착자는 강력을 매개한다. (중력을 매개하는 중력자는 약간 다른 종류의 대칭성-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대칭성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칭성이란 한마디로 말해 ‘구분되지 않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 외모는 대략 좌우대칭이라 거울 속에서 본 모습과 원래 모습이 거의 같다. 주사위에 눈을 표시하지 않으면 어디가 어딘지 알기 힘들다. 공은 대칭성이 아주 높아서 어디에서 보나 똑같은 모습이다.

과학, '방법'을 찾아가는 먼길

소립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나 힘을 매개하는 입자나 모두 강력한 대칭성을 만족하게 되면 서로를 구분하기가 어렵게 된다. 입자를 서로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질이 그 질량인데, 게이지 대칭성이 완벽하다면 이 세상 모든 입자들은 질량을 가질 수가 없다. 전자나 쿼크나 W 등등 모든 소립자의 질량이 0이 된다.

이는 우리 경험과 너무 다르다. 전자는 작지만 질량이 있다. 광자는 질량이 없다. 그러나 W 혹은 Z가 질량이 없다면 진작에 발견되었어야만 했다. 게이지 대칭성이라고 하는 아주 아름다운 수학적 구조를 가진 물리이론이 현실과 맞지 않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보통 과학이론이 실험과 맞지 않으면 즉각 폐기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과학자들은 게이지 이론을 폐기하는 대신 이 대칭성을 깨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성공적인 것이 바로 ‘힉스 장치(Higgs mechanism)’이다.

에든버러 대학의 피터 힉스(Peter W. Higgs, 1929~)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과학자다. 1929년생이니까 올해로 여든에 가까운 나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힉스 장'(Higgs field)이라는 것이 소립자들의 장(field)과 엉겨 붙어 게이지 대칭성을 깨면서 없던 질량을 만들어 낸다. W와 Z 입자들 또한 아주 무거운 질량을 가지는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그 예측된 값을 가지는 새로운 입자들을 1983년과 1984년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힉스 장치에 의하면 '힉스 입자'라고 하는 새로운 입자가 자연에 있어야만 한다. 그 질량은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대략 양성자 질량의 약 115배~300배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힉스 입자는 다른 소립자들에게 질량을 부여하는 독특한 성질 때문에 흔히 '신(神)의 입자'라고 불린다. 고 이휘소 박사가 명성을 날린 것도 그가 힉스 입자를 포함하는 게이지 이론의 내적 정합성을 밝히는 데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참으로 곤혹스러운 점은, 이 정도의 질량이면 지금의 입자가속기에서도 검출되었을 터인데 아직 그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1995년 t 쿼크의 발견으로 표준모형의 모든 소립자를 발견했지만 힉스는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과학자들이 힉스를 찾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표준모형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표준모형이 1960년대 말~70년대 초에 이론적으로 완성된 이후 30년이 넘도록 그 프리마돈나를 직접 보지 못했다면 누가 봐도 체면이 서지 않는 상황이다.

ⓒ CERN

둘레 27Km의 가속기, 오는 11월부터 가동

그래서 2007년 올해를 과학자들이 손꼽아 기다려 왔다. W와 Z입자를 발견했던 바로 그 CERN에서 신형 가속기가 올 11월 가동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가속기의 이름은 '거대 강입자 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 LHC)이다.

가속기의 둘레가 무려 27km에 이르는데, 마주 보고 충돌하는 두 양성자 빔의 에너지는 합해서 양성자 질량의 1만4000배까지 올라간다. 만약 이 정도 에너지에서도 힉스입자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전 세계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실업자 신세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힉스장치를 대체하는 첨단 이론들이 요즘 즐비하기는 하다)

이만한 규모, 이만한 에너지의 실험은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유래가 없다. 11월을 기다리는 과학자들의 심정은 테니스 팬들이 샤라포바와 윌리엄스가 벌이는 세기의 대결을 고대하는 그 마음과 다르지 않다.

돈이 무척 많이 들었을 것 같지만, 미국이 이라크에서 쓰는 대략 열흘치 전비(약2조원)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그 정도 돈 들여서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실험을 한다면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게다.

이 엄청난 기계는 단지 힉스 뿐만 아니라 초대칭성(supersymmetry)이나 그 외 전혀 새로운 현상 또한 발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연의 근본적인 법칙들, 그리고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하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에 좀 더 만족할만한 답을 얻게 될 것이다.

기초과학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자연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는 것 자체가 바로 국가경쟁력이고 또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 CERN이 바로 인터넷이 태어난 곳이며 <천사와 악마>의 주된 소재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LHC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한국 정부도 적지 않은 돈을 여기에 지불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기사를 쓴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태그:#과학, #칼럼, #CHART, #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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