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요일이라 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받아보니 귀에 익은 목소리다. 정우(가명)는 내가 첫 담임을 맡았던 해에 만난 제자다. 일년에 한 두 차례 전화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늘 귀에 익다. 마치 오랜 만에 소식을 전해온 친구의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처럼.

"선생님, 저 정웁니다."
"그래. 지금 어디냐?"
"여기 천안 내려왔다가 후배하고 술 한 잔 하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웬 술이야?"
"아, 아침부터가 아니라…"


대강 상황을 짐작할 만했다. 전에도 이런 일이 두어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한참 맛있게 잠을 자고 있던 한밤중이거나, 막 잠에서 깨어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제 딴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전화를 끊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제가 힘들 때마다 선생님 생각을 하다보니 늘 힘든 모습만 보여드린 것 같네요."

제자의 전화

@BRI@나는 그의 슬픈 가족사를 잘 안다. 그렇다고 그가 전화기를 붙들고 자신의 신세타령을 늘어놓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오래 전에 허리병을 앓았던 옛 담임의 안부를 묻고 또 묻다가 전화를 끊곤 했었다. 다만, 버거운 짐을 잠깐 내려놓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듯한 모습이 수화기를 통해 전해져 올 뿐이었다.

"전화를 한 걸 보니 요즘 힘든가 보구나."
"아닙니다, 선생님. 오늘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다. 선생님은 편안하시지요?"
"그럼. 편안하지. 건강도 아주 좋고."
"언제 선생님하고 산에 한 번 가야하는데요. 허허."

그가 산 이야기를 꺼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새해 첫날, 나는 산 속에서 그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새해 첫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을 오르고 있었고, 정우는 새벽녘에야 일을 끝내고 숙소로 들어가다가 포장마차에서 쓸쓸히 소주잔을 기울이던 중이었다.

같은 시간에 한 사람은 해맞이 하러 산을 오르고, 한 사람은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그런 극명한 삶의 대비가 혹시 서글펐을까? 그는 잠시 동안 말을 잃고 있었고, 내가 그 침묵을 깼다.

"정우야, 우리 언제 산에 한 번 가자."
"산요? 산 좋지요. 허허. 허허허."

정우는 십오 년 남짓 야간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에는 웨이터 생활을 하다가 돈이 조금 모이자 직접 술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한 때는 제법 돈을 만지기도 했지만 아이엠에프 이후 불경기가 계속되면서 있는 돈마저 날리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그를 힘들게 한 것은 그런 생활고가 아니었다.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어딘가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는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성적 친밀감이나 인간적인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는 듯했다. 그는 딱 한 번 내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저도 괴로워요. 정말 진실을 다해서 제 자신을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들만큼 잘 해주고 싶어야 그것이 사랑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돼요. 결국 제 이기심을 채우는 선에서 끝이 나고 말아요. 아무래도 제가 나쁜 놈인가 봐요. 제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정말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새털같이 가볍고 투명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남을 탓하지 너처럼 자기 자신을 탓하지 않아. 내가 보기에 넌 진실한 사람이야. 넌 지금 괴로워하고 있잖아. 괴로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실의 증거야."

그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은 완성형이 아니라는 것을. 진실이란 천성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식물처럼 자란다는 사실을. 흔들리고 괴로워하면서 진실이 커간다는 것을. 나는 시를 배우면서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시를 잘 쓰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다. 시적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진실하지 않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진실하지 않으니 온전한 몰입이 불가능했다. 시적 리얼리티에 가 닿지 못하고 자세만 잡다가 마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렵사리 시의 씨앗을 얻고도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잡티 같은 것들이 날아와 시를 망치곤 했다. 그로 인해 나는 얼마나 괴로웠던가. 하지만 괴로움이 커갈수록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실도 연습이 필요했던 것일까.

바로 그 무렵의 일이다. 겨울 산에 올라 뿌리를 상한 나무를 발견한 것은.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하듯 붙박이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몰입의 순간이었다.

뿌리를 반쯤 내어놓고
비스듬히 누운 겨울 상수리나무
가는 눈송이 몇 점, 그 위에 내려 앉아 있다
뿌리가 상한 나무라면 그마저 괴롭겠구나
나는 가지를 털어 눈을 치우려다, 만다
상한 뿌리라야 눈 내린 것을 알겠지
가지에 등을 기댄 희고 여린 것들
목숨을 부지하여 먼 허공을 날아온.

-자작시 '상한 뿌리를 위하여'


언젠가 나는 정우에게 직업을 바꿔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지금도 나는 그를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그와 함께 산행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조차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니, 나는 안심한다. 그리고 믿는다. 그의 슬픔이, 그의 괴로움이 그를 구원하리라는 것을. 뿌리를 상한 나무가 더 새파란 싹을 틔우리라는 것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