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자주 양치질을 해도 입안이 개운치 않고 급기야 멀쩡하던 어금니가 흔들리는 증상까지 보여 어쩔 수 없이 치과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 치과병원에서 뜻밖에 한 제자를 만났다. 뒤늦게 아는 체를 했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금세 표정을 바꾸며 살가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머, 저를 알아보시네요!"
"당연하지. 근데 왜 먼저 아는 체를 하지 그랬어?"
"죄송해요. 선생님이 절 몰라보시는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있나? 네 이름이…"

제자의 이름은 은자였다. 그 예쁜 이름을 내가 먼저 기억해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긴 머리가 썩 좋지 않은 내가 큰 사건이나 말썽 없이 은자(隱者)처럼 조용히 학창(배움의 창가)시절을 보내다가 오래 전에 학교를 졸업한 제자의 이름을 기억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다가갔으면, 한 번만 더 눈여겨봤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음 주에 나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병원 직원들은 제자를 "박 선생"이라고 불렀다. 상한 어금니를 뺀 자리에 남은 실밥을 뽑고 치석이 쌓인 더러운 치아와 잇몸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을 박 선생이 맡아 해주었다. 보건대학 치위생과를 졸업한, 어엿한 전문 직종인 위생사가 제자. 과거의 선생이었던 나를 치료하고 있는 박 선생이 된 제자가 대견스럽기만 했다.

박 선생은 손거울을 내게 쥐어주더니 칫솔질하는 방법부터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손수 구석구석 칫솔질을 해주면서 일일이 설명을 해주었다. 평소 내가 칫솔질을 얼마나 어설프게 대강 해치우고 말았는지 알만했다.

내가 깨달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아이들을 성의 없이 대해 왔던가. 제자의 섬세하고 확신에 찬 손길에 비하면 나의 행동은 얼마나 굼뜨고 불안하기까지 했던가.

잠시 후, 제자는 내 입 안에 기계를 집어넣고 본격적으로 입안 청소를 시작했다. 귀에 거슬리는 기계음에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나는 눈을 감은 채 편안한 마음으로 제자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좌우상하 어금니와 송곳니를 비롯하여 치아 하나하나마다 공평하게 시간을 할애하며 열심히 치석을 제거하는 동안 나는 다시금 이런 생각에 빠져 들었다.

"내가 언제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온전히 수고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 제자는 굳이 사랑을 내세우지 않고도 직업적인 책임감만으로도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나는 입으로만 사랑을 남발하면서 정작 할 일을 미루거나 건너뛴 적도 많았다. 그렇다면 나는 사랑의 교사이기는커녕 직업적인 성실함마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한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랑이 너무 버거워 직업인으로서의 의무만 다하겠다는 속다짐 같은 거 말이다. 알량한 사랑을 주고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한 것도 그렇거니와, 교사로서의 의무를 한 수 아래쯤으로 우습게 여긴 내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그날 나는 훌륭한 제자를 둔 덕에 뿌리까지 상하여 악취를 풍기던 내 마음의 어금니까지 덤으로 뽑아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조금 손질하였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