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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쪄서 한 김도 안 가신 뜨거운 물고구마. 노란 속살엔 달달한 꿀물이 배어 있지요.
방금 쪄서 한 김도 안 가신 뜨거운 물고구마. 노란 속살엔 달달한 꿀물이 배어 있지요. ⓒ 이승숙
"어머니, 오늘 점심은 고구마로 해요. 난 밥보다 고구마가 더 좋아."

고구마를 좋아하는 딸애가 또 고구마 타령을 합니다.

"그래, 그럴까? 그러면 가서 고구마 한 바가지만 갖고 온나."

고구마를 씻어서 솥에 앉혀놓고 옛날 생각을 합니다.

@BRI@내 기억 속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지도 않았고 배고프지도 않았습니다. 삼 시 세끼 따뜻한 밥을 먹으며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돌아보니 매 끼니마다 밥을 먹었던 건 아니었네요.

여름이면 감자로 점심 한 끼를 때우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엔 수제비도 자주 끓여 먹었습니다. 겨울이면 고구마를 한 솥 삶아서 붉은 배추김치랑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었던 거 같네요. 고구마 소쿠리를 앞에 두고 둘러앉아서 오순도순 까먹었는데 밥이라기보다는 꼭 새참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껍질을 깐 고구마 위에 붉은 김치를 한 점 척 걸쳐서 입에 넣으면 고구마와 김치가 함께 어우러져서 독특한 맛을 냈지요. 입가에 벌겋게 김치 국물을 묻히고서도 뭐가 좋은지 우리는 낄낄대면서 고구마를 까먹었어요.

그 때 먹었던 고구마는 다 물고구마였어요. 껍질을 까면 속살이 노랗던 물고구마는 물렁물렁하고 달콤했어요. 하지만 가끔씩은 고구마가 먹기 싫어서 소쿠리에 고구마를 내동댕이치기도 했어요.

고구마만 먹고 살아라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집에는 산 밑에 열 마지기 밭이 있었어요. 그 밭에 여러 가지 곡식을 심었는데 맨 위 꼭대기에는 늘 고구마를 심었어요.

봄이 되면 엄마는 잘 보관해 두었던 씨 고구마를 꺼내서 양지바른 한 쪽에다 심어놓고 모종을 냈어요. 그 모종 터에는 고구마 말고도 호박이랑 오이 같은 것들도 함께 자라고 있었지요. 고구마 줄기가 길게 자라면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고구마 모종을 만들었어요.

비가 올 듯이 보이는 늦봄의 어느 날 고구마 줄기를 잘라서 밭에다 옮겨 심습니다. 고구마 모종을 내고 난 다음에 다행히 비가 오면 고구마는 금방 생기를 찾고 자리를 잡아갑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새로 심은 고구마 모종은 새들새들 물기가 다 빠져서 축 늘어지곤 했어요.

서리가 내리기 전에 고구마를 캐야 됩니다. 슬쩍이라도 서리를 맞아버리면 고구마는 금방 썩어 버립니다.

고구마 줄기는 소가 좋아하는 먹이입니다. 그래서 고구마 줄기를 낫으로 쳐서 다 걷어 놓습니다. 그러고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한 고랑(두둑한 땅과 땅 사이에 길고 좁게 들어간 곳)씩 차고 앉아서 고구마를 캡니다. 캐다 보면 산그늘이 내려와서 슬슬 추워집니다.

고구마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바깥에 놔두면 다 얼어버립니다. 언 고구마는 금방 썩어버리기 때문에 고구마는 반드시 훈기가 있는 방에 놔둬야 됩니다.

사랑방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은 언니와 내가 자는 방이었습니다. 그 방 윗목에 고구마를 담은 가마니를 두었습니다. 가마니 가득 채운 고구마 가마니가 두 개씩이나 쌓여 있었습니다.

물고구마에 김치를 곁들여서 먹으면 금상첨화이지요.
물고구마에 김치를 곁들여서 먹으면 금상첨화이지요. ⓒ 이승숙
긴긴 겨울밤이면 입이 궁금해집니다. 그러면 언니가 슬슬 나를 꼬입니다.

"우리 가위, 바위, 보 해서 지는 사람이 고구마 깎아주기 하자."

언니와 나는 흙이 묻은 고구마를 만지기 싫어서 온갖 수를 다 써가며 가위, 바위, 보를 했습니다. 삼판이승의 내기에서 승률은 거의 비슷비슷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늘 이기려고 매번 할 때마다 온갖 수를 다 썼습니다.

물고구마는 생으로 먹어도 맛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게 맛있는 고구마인지 다 압니다. 겉껍질 색이 빨갛게 짙고 단단한 고구마는 보나마나 물기가 없습니다. 그런 고구마는 깎아 봤자 맛이 없습니다. 또 동글동글한 고구마도 맛이 없습니다. 씹어보면 물기가 없어서 팍팍하기만 합니다.

긴긴 겨울밤 입이 궁금할 땐 고구마를 깎아 먹었지요

껍질의 색이 옅고 덜 단단한 고구마는 틀림없이 물기가 많은 물고구마입니다. 그런 고구마는 동글동글하지 않고 길쭉합니다.

물고구마는 벌써 깎을 때부터 다릅니다. 뻑뻑하지 않아서 낫으로 잘 깎입니다. 다 깎아서 한 입 베어 물면 달달한 물기가 입 안에 고였지요. 그런 고구마는 암만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어요. 날고구마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어서 물기 많은 똥을 누게 됩니다. 그래도 맛이 있어서 밤마다 바가지에 수북하게 껍질이 나오도록 깎아 먹었습니다.

생으로 먹는 고구마가 아무리 맛있다 해도 고구마라면 역시 군고구마가 제일 맛있지요. 우리 아버지는 아침저녁마다 고구마를 구워 주셨어요. 소죽 끓이고 나서 불기가 남아 있는 아궁이에 고구마를 몇 개 던져 넣고 재를 잘 덮어 주면 고구마는 저절로 익습니다. 아버지는 소죽 끓이고 나면 꼭 고구마를 묻어두었어요.

금방 꺼낸 군고구마는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모릅니다. 달디 단 국물이 흘러내릴 때도 있습니다. 아, 그 때 먹었던 그 고구마 맛이라니...

그렇게 맛있던 물고구마가 한 때는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물고구마보다는 밤고구마를 더 낫게 쳐주었어요. 밤고구마는 동글동글한 게 생긴 것도 귀여웠지요. 찌거나 구워 놓으면 까먹기도 좋았어요.

하지만 밤고구마의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타박타박해서 목이 메는 밤고구마보다는 달달하고 물렁거리는 물고구마를 더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물고구마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고구마 이름이 어느 순간부터 호박고구마로 바뀌었네요. 고구마 속살이 노랗다고 호박 고구마라고 부릅니다. 그래도 나는 물고구마라고 부를 거예요. 어린 시절 부르던 이름 그대로 물고구마입니다.

커다란 냄비에 물을 붓고 채반을 얹어서 고구마를 쪘습니다. 푹 익어야 제 맛이 나므로 김이 나고도 한참동안 더 불을 끄지 않았습니다. 젓가락으로 찔러보았더니 푹 들어갔습니다. 이러면 아주 잘 익은 겁니다.

고구마와 김치를 한 접시씩 담아서 내왔습니다. 식구들이 아주 맛있게 먹습니다. 고구마는 화학 첨가물이 하나도 안 들어간 완전 무공해 식품입니다. 섬유질이 많아서 변비에도 좋답니다. 우리 집 식구들은 앉은 자리에서 두 개 세 개씩 까먹습니다. 예전 나 어릴 때는 쌀 아끼려고 밥 대신 먹던 고구마를 지금은 맛으로 먹습니다. 고구마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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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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