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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방학내내 심심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우리집 큰 아이 송인효
ⓒ 송성영
"아, 심심해 뭐 하구 놀지?"

인상이 녀석은 혼자서도 잘만 노는데 인효 녀석은 틈만 나면 심심하다고 투덜거립니다. 사나흘이 멀다 싶게 사람들을 만나고 여기저기 끼웃거리며 싸돌아다녔는데도 심심하다고 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고 싶어 목이 타는 모양입니다.

@BRI@사실 방학이라고 하지만 놀 친구가 별로 없었습니다. 집으로 놀러 오는 아빠 친구 아이들이 전부였습니다. 일이년 전까지만 해도 등교하는 날이든 방학이든 간에 일주일에 한두 차례 친구들이 놀러와 집 주변이 시끌벅적했는데 요즘은 놀러 오는 놈들이 없습니다. 인효 녀석은 차라리 학교 가는 게 낫다고 투덜댑니다.(녀석은 아마 개학을 하게 되면 방학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짜식이, 엊그제 은빈이네 놀러 왔잖어, 갑사두 갔다 오구선."
"그래두 심심해."
"친구덜한티 전화 혀, 놀러 오라구, 아니믄 니가 놀러 가든지."
"다 학원가야 한댜."

인효 친구 녀석들 대부분이 학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녀석들이 한두 살 더 먹은 만큼 학원이나 학습지를 한두 개 더 하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 한창 컴퓨터에 맛이 들려 있어 집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 큰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두 녀석이 들떠 있었습니다. 3년 전 공주 시내로 이사 갔던 인효 친구 김범수가 놀러 오기로 한 것입니다. 어제 밤 범수에게 전화를 걸어 놀러 가겠다고 했더니 범수가 놀러 오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범수가 오면 뭘 하고 놀까, 녀석들은 이른 아침부터 궁리중입니다.

"범수 오믄 야구하고 놀아라, 방멩이두 생겼잖어."
"아참 그렇지."

▲ 인상이가 종이로 만든 야구공
ⓒ 송성영
얼마 전 울산에 사는 은빈이네가 우리 집에 놀러 오면서 아이들 선물로 야구 방망이와 야구 장갑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공이 없었습니다. 인상이는 종이 뭉치를 공처럼 단단하게 뭉쳐 놓고 그것을 다시 검정 테이프로 둘둘 말았습니다. 그게 야구공이랍니다.

사실 우리 집에 야구공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프로야구 선수 송진우가 사인한 야구공입니다. 아이들 고모부가 준 것인데 좁은 집 마당에서 놀기엔 너무나 딱딱했습니다. 그 공은 집나간 야옹이가 가지고 놀다가 이제는 곰순이의 장난감이 되었습니다.

녀석들은 범수가 오면 함께 놀 것이라며 연습 삼아서 한 놈은 던지고 한 놈은 방망이를 휘두릅니다. 포수는 따로 없습니다. 부서진 의자가 포수입니다. 종이로 만든 공이 의자에 맞게 되면 무조건 스트라이크입니다.

ⓒ 송성영
저게 야구공이 될까 싶었는데 신통하게 잘 날아갑니다. 정확하게 맞으면 쭉쭉 뻗어나가 사랑채를 훌쩍 넘깁니다. 넘기면 홈런입니다. 재미있어 보입니다.

"나두 한번 해보자."
"그래 아빠두 시켜 줄게."

던지는 것은 쉬운데 막상 방망이를 휘둘러보니 공 맞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점심 무렵 두 녀석이 느티나무로 달려갑니다. 김범수가 우리 집에 곧 도착할 것이라는 전화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 세 명이 번갈아 가며 포수. 투수. 타자 노릇을 했다. 포수 보는 녀석이 범수.
ⓒ 송성영
범수가 오자 포수가 생겼습니다. 세 녀석이 번갈아가며 역할을 바꿉니다. 포수를 했다가 타자가 됐다가 투수가 됩니다. 관중도 있습니다. 범수가 '땅콩카라멜'을 한 봉다리(봉지의 방언) 사 가지고 왔는데 나는 볕 좋은 마루에 걸터앉아 그걸 오물오물 까먹어가며 스트라이크니 볼이니 참견했습니다.

▲ 정확하게 맞으면 사랑채를 훌쩍 넘기는 홈런도 나온다
ⓒ 송성영
아이들은 한 시간쯤 마당에서 신나게 놀고 나더니 엄마가 준비해준 떡볶이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절에서 쌀이 남아돈다며 몇 자루 가지고 왔는데 그걸로 작은 가래떡을 만들어 손님들이 찾아오면 떡볶이 요리를 내놓고 있습니다.

떡볶이를 다 먹고 난 녀석들은 묶여 있던 곰순이까지 데리고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아이들이 없어서 심심했는데 조금 있다가 인상이 녀석이 끈을 가지러 왔습니다.

"뭘 할려구?"
"산에다가 본부 지으려구."

어떤 본부를 짓는가 싶어 슬그머니 뒤따라갔는데 본부는 짓지 않고 산 중턱에서 곰순이 하고 뒹굴며 놀고 있었습니다.

녀석들 틈에 끼어 같이 놀고 싶었지만 그만두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범수 녀석이 워낙 내성적이라 내가 끼어들면 잘 놀지 못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녀석들에게 전염이라도 된 듯 심심해졌습니다. 안방에 있는 아내에게 같이 놀자며 사랑채로 불렀습니다. 아내는 책장에서 '히말라야의 성자들'이라는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면서 말합니다.

"범수하구 인상이 녀석 정말 말이 없데, 아까 떡볶이 먹는데 인효 녀석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는 태진아보다 송대관이 더 좋다, 그러더라구."
"뜬금없이?"
"응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그랬더니 범수가 뭐랴?"
"가만히 있지 뭐, 두 눈만 꿈벅거리며."
"두 놈 다?"

두 놈 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떡볶이만 우적우적 먹더랍니다. 우리 집 작은 아이 인상이와 범수 녀석은 말수가 거의 없는 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두 녀석이 만나면 말없이도 잘 놉니다. 말수가 거의 없다보니 다투는 일도 없습니다. 녀석들은 서로 양보해 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잘 놉니다. 아마 하루 종일 그렇게 놀라고 해도 그렇게 놀 것입니다.

반면에 인효 녀석은 말문이 터지기 시작하면 수다쟁이 아줌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말이 많습니다. 그런 녀석이 말수가 없는 녀석들 틈에 끼어 놀았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했으면 얼토당토않은 '송대관'과 '태진아' 얘기를 꺼냈겠습니까.

범수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범수를 데리고 가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구 가게 내비 둬유, 지들끼리 잘 노는디."

▲ 어두워질 때까지 산에서 노는 아이들
ⓒ 송성영
결국 범수를 하룻밤 더 놀다가게 했습니다. 뒷산에서 놀던 녀석들은 날이 어둑어둑 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범수야 자구가두 되지?"
"예?"

녀석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아까 엄마 하구 얘기 했어, 자구 내일 가기로."
"아 예..."
"좋지?"
"예."

"송인효! 오늘 재밌게 놀았어?"
"응 재미있었어, 근데 산에서 놀자마자 막대기 두 개가 부러져 버렸어, 아빠가 만들어준 나무 칼 있잖어 그거."

하지만 내일 아침밥을 먹고 범수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인효 녀석은 또 다시 그럴 것입니다. "아 심심해 이제 뭐 하구 놀지?"

생각해 보면 '아, 심심해 뭐 하구 놀지'. 이 말은 불만족 때문만이 아닙니다. 뭔가를 하겠다는 강한 욕구입니다. 그 강한 욕구를 컴퓨터 게임이나 뭔가로 충족시켜줘야 될 것 아니냐구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말하는 것은 컴퓨터 게임이나 텔레비전 시청을 통제 당해서 오는 불만족 때문이 아닙니다. 녀석들이 심심하다는 것은 뭔가를 하면서 놀고 싶은데 딱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심심하다고 칭얼대다가 결국 뭔가 재미꺼리를 만들어 하게 된다.
ⓒ 송성영
심심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녀석들은 결국 스스로 뭔가를 찾습니다. 인상이는 망치를 들고 투닥투닥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인효 녀석은 콧구멍 후벼가며 책을 읽든지 합니다. 때론 캠코더를 들고 뭔가를 찍거나 이제 배우기 시작한 통기타를 튕겨 봅니다.

그도 아니면 둘이서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를 만들어냅니다. 친구를 끌어들이거나 아빠를 꼬여 숨바꼭질을 하거나 축구공을 차든 목검을 휘두르든지 곰순이처럼 땅을 후벼 파든 뭔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재미를 붙입니다. 컴퓨터 게임이나 텔레비전에 재미 붙이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그 재미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심심하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를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일 겝니다. 학원이나 컴퓨터 게임, 텔레비전에 빠져 지낸다면 심심하다고 말할 여유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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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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