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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메츠 야스오미의 <카이트>
우메츠 야스오미의 <카이트> ⓒ 스튜디오 ARMS
<카이트>는 영화 <킬빌>의 '인용 리스트'에도 올라가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스토리 자체도 <킬 빌>에게 꽤 많은 영감을 선사한 것 같은데, <카이트>의 주인공 '사와'는 <킬 빌>의 '오렌 이시이(루시 루)'와 비슷한 캐릭터다(물론 현실은 우마 써먼의 캐릭터와 비슷한 면도 있지만). 부모님의 비극적인 죽음을 계기로 전문 킬러로 양성됐으며, 성적 착취와 폭력에 의해 메마르게 된 캐릭터.

'전문 킬러'라는 설정에서 뤽 베송의 영화 <니키타>나 브리지트 폰다 주연의 <니나> 등이 연상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연약한' 이미지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그 중에서도 '소녀'라는 캐릭터가 거친 남성의 세계와 욕망의 제물이 된다는 것은 비극적이면서도 자극적이다.

<카이트>는 그런 세계에 걸맞은, 아니 그 세계를 뛰어넘는 액션의 묘미를 선사한다. 표현 수위가 비교적 자유롭다는 OVA(Original Video Animation, 판매용 비디오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걸쳐 있기에 액션의 강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원색적인 피와 자극적인 섹스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골수 '오타쿠'들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것이다.

OVA 애니메이션은 DVD가 일반적인 유행과 경향으로 자리 잡은 요즘 시대에서는, 단어 그 자체로 봤을 때는 옛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극장판 애니메이션과 TV 시리즈의 중간자적 위치에서 흥행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메츠 야스오미는 성인용 OVA 시장에서 강도 높은 폭력과 섹스 장면으로 어필해 왔다. <카이트>와 더불어 <메조 포르테> <로보트 카니발> 등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카이트>나 <메조 포르테>는 살인과 암살이 난무하는 뒷골목 범죄 세계를 묘사한다. 다만 <카이트>가 본질적이고 음울하며, 알 듯 모를 듯한 비극을 그리는 것과는 달리 <메조 포르테>는 자극적인 오버가 넘친다. 하지만 두 작품의 틀과 스타일은 비슷하다. 폭력과 섹스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지만 폭력의 비중이 더 크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섹스라는 요소는 정말 뜬금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카이트>는 어지간한 할리우드 액션 영화는 훨씬 능가하는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압권이다. 숨기지 않고 '19금' 애니메이션임을 당당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싸구려'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막상 보면 싸구려가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카이트>의 한 장면
<카이트>의 한 장면 ⓒ 스튜디오 ARMS
53분(2부) 동안 오타쿠들의 구미를 자극할만한 요소를 적절히 잘 버무려놓다가, 여운을 남기는 엔딩을 선택함으로써, 오타쿠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그 센스는 탁월하다. 대중문화 아이콘 존재를 확실히 과시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관객이나 마니아로 하여금 논쟁을 유발하는 방법일 것이다.

<카이트>는 비극 덩어리다. '뜬금없음'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필요성을 과시하는 정사 장면 역시 주인공 '사와'의 비극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질적으로는 소녀의 성(性)이 남성의 세계에서 어떻게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러니하다. 상당수의 일본 '야애니'는 소녀의 성을 매개로 남성들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를 납치 살해한 M군 사건 역시 그런 애니메이션에 심취한 도착증 환자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카이트>는 시궁창에서 사랑에 빠진 두 남녀를 매개로, 무궁무진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권력과 청소년'의 차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며, 물론 이야기 그 자체로서도 상당한 매력을 안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엔딩을 상당히 모호하게 처리하면서 생긴 시너지 효과다.

겉으로 봤을 때는 캐릭터의 미래를 위한 당장의 이야기에 대한 논쟁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타락한 권력이 비극적인 두 남녀에게 어떤 식으로 끈질긴 잔혹함을 과시하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화려한 액션과 정사 장면도 그런 차원으로 해석하면, 충분히 일리 있는 포석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극단적 상상과 연출이 가능한 '애니메이션'

<메조 포르테>
<메조 포르테> ⓒ 스튜디오 ARMS
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비극이 범벅이 됐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카이트>는 두 남녀의 '몸부림'을 그려놓은 애니메이션이다. 몸부림이 격하고 처절해질수록, 그 끈적한 끈은 더욱 거칠게 달라붙는다. <카이트>가 슬퍼 보이는 이유, 결코 싸구려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거친 삶의 이면을 이야기하기 때문은 아닐지.

그렇듯 애니메이션은 보다 풍부하고 넓은 상상도 가능하고, 극단적인 상상과 연출도 가능하다. 그 세계에서는 현실에서 묘사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허무주의와 비극적인 미래를 그릴 수도 있으며, 온갖 다양한 패러디도 모두 거침없이 그려낼 수 있다. 물론 독자적인 가상의 세계도 창조할 수 있다. 드넓은 상상의 영역, 그렇기에 미지의 영역인 곳이 바로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그 '적나라함'은 국내의 대다수 관객들에게까지 받아들여지기에는 무리한 부분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카이트>는 2001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의 상영불가 판정으로 인해 상영이 취소되는 해프닝을 겪었고, 국내에 출시된 DVD의 경우 정사 장면이 대폭 삭제돼 출시됐다.

하지만 <카이트>는 그 드넓은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OVA 애니메이션이라는 그 틀도, '오타쿠' 취향의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이 아니라면 여전히 낯선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낯설음에 대한 도전은 우리의 인생살이에서도 정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애니메이션의 가능성 역시 낯설음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신문 필진네트워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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