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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사 이월당, 이월에는 여기로...
동대사 이월당, 이월에는 여기로... ⓒ 신병철
동대사는 대불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불전 동쪽으로 수많은 절집들이 늘어서 있다. 이름도 이월당, 삼월당, 사월당… 등으로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동대사가 너무나 넓고 절이 많아 예배하는 사람들은 어디 가서 기원하는 것이 가장 효험이 좋은지 헷갈려 했단다. 그래서 2월에는 이 집에서, 3월에는 저 집에서… 매월 기도하는 곳을 지정해주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름도 이월당, 삼월당, 사월당, 오월당으로 붙여졌단다.

동쪽으로 올라가면 범종을 매단 종루가 나타난다. 튼실한 건물이다. 걸려 있는 종도 우리 고대의 범종과는 구별이 좀 된다. 종도 종루도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종루는 다른 건물과는 달리 추녀 끝을 한껏 위로 쳐들고 있다.

그러나 서까래는 추녀와 끝까지 직각되게 구성했다. 우리의 서까래가 추녀쪽에서는 점차 추녀방향으로 변해가는 부채꼴 서까래인 것과는 다르다. 일본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석제 기단은 영락없이 우리와 꼭 같다. 우리 문화의 영향일까?

동대사 종루, 이삼사오월당 건물 앞쪽에 있다. 튼실한 건물에 우리와는 조금 다른 범종이 걸려 있다.
동대사 종루, 이삼사오월당 건물 앞쪽에 있다. 튼실한 건물에 우리와는 조금 다른 범종이 걸려 있다. ⓒ 신병철
종루를 지나면 전면에 삼월당이 자리잡고 있고, 왼쪽으로 이월당이 위쪽으로 펼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사월당, 오월당이 있다. 이월당 올라가는 계단 좌우에 비석들이 꽉 들어차 있다. 자세히 보았더니 돈 액수와 이름이 적혀있다. 아마도 절간 개증축하는데 희사한 사람 이름과 액수일 것이다. 정말 계산적이고 현실적이다. 돈 내는 만큼 확실하게 내세워주고 있다.

이월당도 일단은 크고 제법 복잡하다. 내부는 마치 신사 내부같다. 과거에 지었던 것들을 다시 수리하면서 신사처럼 변해갔을 것이다. 내부 전체가 보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월당 청동 연꽃모양 등, 내부는 신사와 비슷하다.
이월당 청동 연꽃모양 등, 내부는 신사와 비슷하다. ⓒ 신병철
정창원은 대불전 뒤에 있으나, 개방하지 않고 있다. 1년에 한번 잠깐 동안 보관 유물의 극히 일부를 전시한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신라장적은 벽의 초배지였다고 한다. 내용을 살피고 공개한 뒤에 다시 원래대로 발라버렸단다. 일본에는 이런 국내외 유물이 무궁무진하다.

전국적인 전쟁이 없어서 유물의 손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설득력이 없다. 일본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적 유물들을 철저히 보관하고 정리하고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장기간 무사 집권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까?

그들은 과거의 소중한 것들은 당장 소용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필요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보관하고 보호해 왔다. 일본이라고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도, 수많은 문화재가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으니 부럽고도 부러운 일이다. 석제도 아닌 목제 문화재인데도 불구하고 많이도 남아 있다. 이런 태도만은 일본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경주남산에 있는 머리가 훼손된 불상들, 조선 시대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경주남산에 있는 머리가 훼손된 불상들, 조선 시대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 신병철
우리는 왕조나 집권세력에 따른 이념 차이로 이전의 문화재를 소홀히 다루고 파괴한 경우가 있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내세웠고, 그것이 더욱 배타성을 띠면서 수많은 불교 유적들을 파괴했다.

일부 유생들은 불교 문화재 파괴를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강한 충직적 자세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사문난적'(斯文亂賊) 성리학 아닌 것들은 모두 없애버리려고 한 과정에서 많은 우리의 문화재는 없어져갔고, 변질되었다.

이런 경향은 가장 최근에도 계속되어 수많은 유무형문화재가 사라져갔다. 1970년대 소위 근대화란 이름으로 우리의 전통은 사라져갔다. 지붕개량과 함께 농촌에 존속해왔던 전통문화가 소위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전근대적 청산 잔재로 여겨져 내팽개쳐졌다.

불교적 경향을 지니면서 귀족성을 지닌 청자도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문화 성향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결코 사용하거나 보호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청자가 고려시대 제작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청자는 모두 무덤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여기에 임진왜란, 6.25한국전쟁 등 전국적인 전쟁까지 겹쳤으니 문화재들은 그야말로 수난을 당해왔던 것이다.

동대사 귀틀집, 고대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구려 부경이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동대사 귀틀집, 고대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구려 부경이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 신병철
삼월당의 원래 이름은 법화당(法華堂)이다. 법화당 오른쪽 앞에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 있다. 기둥도 도리도 없이 아래부터 위로 나무들을 엇갈리게 짜맞췄다. 가장 오래된 건축양식으로 귀틀집이다. 정창원도 이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고대식 귀틀집이 일본에 그대로 전승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 약탈 창고인 부경(浮輕)도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고구려 부경의 모습을 일본 나라지역 동대사에서 볼 수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법화당은 기단 위에 난간을 두르고 그 위에 전체적으로 넓게 지은 제법 큼직한 일본식 절간이다. 내부는 입장료를 따로 내고(500엔) 들어 갈 수 있었다. 함께 간 수백명의 일행이 있었으나 들어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부에 일본의 보물이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절간은 불상을 모셔 예배하기 위한 공간이므로 외부만큼이나 내부도 중요하다. 부처님 계신 곳이 극락이니 금당 안을 바로 극락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법화당 삼월당의 전면 모습
법화당 삼월당의 전면 모습 ⓒ 관광카드사진
실내는 너무 어두워 자세히는 볼 수 없었다. 가장 중앙 높은 곳 앙련 복련 대좌 위에 팔을 여럿 가진 관세음보살님이 서 있다. 관음상 주변에는 열다섯이나 되는 관음의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두번째 줄의 지장보살과 부동명왕을 빼고 모두 8세기 덴표(天平)시대 만든 것이라고 한다. 덴표(天平)는 쇼무(聖武)천황의 연호이니 8세기 중엽에 해당한다. 바로 신라의 화엄사상에 심취하여 불사를 크게 일으킨 천황이다.

법화당 내부 모습, 맨 앞줄에 금강역사와 사천왕이 있고, 중앙 높은 곳에 관세음보살상이 있으며, 바로 그 앞에 월광일광보살이 서 있다.
법화당 내부 모습, 맨 앞줄에 금강역사와 사천왕이 있고, 중앙 높은 곳에 관세음보살상이 있으며, 바로 그 앞에 월광일광보살이 서 있다. ⓒ 신병철
관세음보살상은 상당히 관능적이다. 표정도 근엄하다. 당나라와 통일신라의 불상의 모습과 유사하다. 바로 앞에 있는 월광보살과 일광보살도 미소는 없으나 세련된 모습이 당시 통일신라의 보살상과 닮았다.

맨 앞줄 중앙의 금강역사상과 좌우의 증장천왕, 지국천왕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무서운 표정 속에 익살이 살아 있는 신라 형상과는 달리 험상궂은 표정이 조금 살아 있다. 당과 신라로부터 불교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일부에서는 일본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전체적으로 법화당의 불상들은 2개를 빼고 모두 통일신라, 당나라 불상과 같은 종류의 불상이다. 덴표시대가 고대 불교가 최고조에 달했던 당나라 중기, 신라중대에 해당한다. 법화당의 조각들은 바로 최고수준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여 제작된 것이었다. 대륙 불교를 일본은 열심히 받아들이면서 일본 불교 문화의 바탕을 마련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불교 문화에서 일본식 색채가 완연해지는 것은 9세기 후반부터 시작한 헤이안 시대였다고 한다.

오이타 우스키 석불군 중 가마쿠라시기의 불상, 얼굴이 둥글고 짧은 특징이 있으면 카마쿠라시대 불상이다.
오이타 우스키 석불군 중 가마쿠라시기의 불상, 얼굴이 둥글고 짧은 특징이 있으면 카마쿠라시대 불상이다. ⓒ 신병철
동대사 남쪽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박물관에도 엄청난 불교문화재가 있었다. 유물들에는 표찰이 있고, 표찰에는 소장자와 단체의 이름이 꼭 적혀 있었다.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더니 완장을 하나 준다. 단 플래시를 사용하지 말고 '나라박물관 소장품'만 찍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상당히 합리적인 방안이라 여겨졌다. 무조건 사진 못찍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프랑스 루부르 미술관에서는 플래시 사용도 허용하나 삼각대 사용만 금지하고 있다.

일본의 불상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시대의 특징을 찾아본다. 우리의 불상이 그렇듯이 일본 불상 역시 중국과 우리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본다. 6,7세기 일본의 불상은 백제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호류지의 관음보살상과 금당 본존불처럼 부드럽고 이상적이며 우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후지와라 헤이안 시대 불상, 8세기 후지와라는 세련된 신라양식을 느낄 수 있으나, 헤이안불상은 완전히 일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은 고류지에, 오른쪽은 나라박물관에 있다.
후지와라 헤이안 시대 불상, 8세기 후지와라는 세련된 신라양식을 느낄 수 있으나, 헤이안불상은 완전히 일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은 고류지에, 오른쪽은 나라박물관에 있다. ⓒ 신병철
나라시대는 (덴표시대는 여기에 포함되며, 후지와라 가문이 권력을 장악한 시대이기 때문에 후지와라시대도 여기에 포함된다.)에 해당하는 불교가 가장 활성화된 8,9세기의 불상은 당나라와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아 육감적이고 근엄하며 당당한 모습을 많이 띠고 있다.

헤이안시대에 해당하는 9세기부터 12세기까지의 불상은 점차 대륙과 반도의 영향을 벗어나서 일본 고유의 모습을 띠어가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인 14세기 이후는 완전히 일본화한 불상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본남자고등학생의 교복, 동대사 대불전 앞에서 한국교사와 일본 고등학생이 함께 찍었다.
일본남자고등학생의 교복, 동대사 대불전 앞에서 한국교사와 일본 고등학생이 함께 찍었다. ⓒ 신병철
나라박물관에서도 나는 또 감동을 먹는다. 너무나 다양하고 많고 보관이 잘된 불교조형물들이 즐비한 사실에. 그러고 보니 일본 고등학생들의 교복도 옛날 그대로이다. 동대사에 수학여행 온 남학생의 교복이 6,70년대 우리의 교복 그대로이다. 머리 모양만 다르고.

여학생의 교복도 옛날 우리의 교복과 비슷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치마 길이가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옛날이 그리워서 그리고 신기해서 사진 같이 찍자고 하면 쉽게 찍혀준다.

교복도 옛것을 보관하고 지키는 일본사람들의 성향을 반영한 것일까? 일본이 싫지만 옛것을 그대로 보관하고 지키고 아끼는 성향은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문화재가 무궁무진한 일본이 부러우면서도 무섭다.

덧붙이는 글 | 2006년 1월과 12월 일본의 나라 지역을 우연찮게 두 차례나 여행하였습니다. 1월에는 가고싶어서, 12월에는 한민족사탐방단의 한사람으로, 덜 본 것이 있어서 여행하였답니다. 이것은 나라 지역의 불교 문화재를 중심으로 작성한 여행기 중 2번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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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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