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서울문화사
이 작품들은 일본 현지에서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큰 호평을 받으며 걸작의 반열에 올랐음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데스노트>는 최근 영화로 제작된 1편에 이어 2편 <라스트 네임>이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고, <쿠로사기>와 <원한해결사무소>는 지난 2006년 나란히 일본 현지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지뢰진>은 현재 국내 방송사에 판권이 인수되어 TV 수사극으로 제작을 준비 중이다.

보수적이고 규격화된 문화를 지닌 일본에서 사회질서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이러한 독단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반영웅의 캐릭터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이들이 가진 초인적인 능력과 더불어, 인간의 내면에 간직한 어두운 본능을 대리만족시켜주는 영웅상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세상은 공평하지 않으며' 법과 제도는 사회적 약자인 인간들을 지켜주는데 한계가 있다. 여기서 반영웅적인 주인공들은 허울뿐인 제도와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들만의 능력과 정의로 악을 심판한다. 여기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일 뿐 때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냉혹함과 잔인함은, 선과 악의 구분마저 모호하게 만든다.

사기를 당하여 가족들마저 잃어버린 아픈 기억이 있는 쿠로사기가 스스로 '사기꾼을 잡아먹는 사기꾼'이 되어 복수에 나선다는 설정의 <검은사기>는 그래도 건전한(?) 편이다.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과거 상처가 분명하고, 최소한 악인을 심판하더라도 죽이거나 피를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법에 의한 정의를 외치는 가난한 여대생 츠라라를 비웃으면서도 종종 흔들리는 모습을 내비치는 주인공 쿠로사기는 냉철한 프로사기꾼이라기보다는 환경에 의하여 잠시 삐뚤어진 불완전한 청춘에 가깝다.

반면 <지뢰진>의 주인공 이이다 쿄야는 그야말로 냉혹한 반영웅의 전형이다. 만일 쿠로사기의 범죄행각이 <지뢰진>안 이었다면, 쿄야는 일말의 동정은커녕 비웃음과 함께 쿠로사기에게 총알을 날렸을 것이다. 쿄야는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던 여자와 파트너의 주검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냉혈한이다.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범인을 앞에 두고도 '오후 5시까지는 형사다. 지금은 11시라 (퇴근했으니) 상관없어'라고 일축하는 '쿨함'에는 제아무리 대담한 범죄자라도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당신에게도 데스노트가 있다면?

ⓒ 서울문화사
그나마 형사라는 면죄부가 있는 쿄야에 비해, <원한해결사무소>의 원한해결사(우라미야)는 또 한 술 더 뜬다. 자신의 실명을 잘 드러내지 않고 오직 '원한해결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그녀는, 법으로 심판하지 못하는 악인을 처벌하거나 억울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의 원한을 대신 해결해주는 청부업자다.

단순한 '킬러'가 아니라 실질적 살해, 사회적 말살에 이르기까지 원한 해결의 방법도 다양하고, 패륜아, 살인범에서 이웃간의 소소한 분쟁, 헤어진 연인에 이르기까지 범위도 넓다. 원한해결사의 규칙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상대를 말살한다' 그리고 '처벌에는 남녀고하가 없다'는 것.'

1권 첫 에피소드에서 아내의 죽음에 눈이 먼 남자의 복수심을 이용하여 다른 대상을 죽이거나,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10대 청소년과 어린 아이까지 잔인하게 처벌하는 원한해결사의 방식에선 서늘함까지 느껴진다. 초반에는 오직 돈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 같다. 하지만 후반부에는 선악이 분명한 피해자의 경우, 의뢰받지 않은 일이라도 나서서 악을 대신 응징하는 단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반영웅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필요악'이라는 것. <검은사기>의 쿠로사기는, 법에 의한 정의를 외치는 여주인공 츠라라를 향해 "법이 너의 무엇을 지켜줄 수 있지?"라고 냉소한다. <원한해결사무소>의 원한해결사나 <지뢰진>의 이이다 쿄야는 심판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추호도 망설임이 없지만, 그들이 처벌하는 것은 항상 동정의 여지가 없는 '절대악'이다.

이러한 반영웅적 캐릭터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인물은 바로 <데스노트>의 야가미 라이토일 것이다.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신의 힘이 깃든 노트를 가지고, 악인을 처벌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라이토의 의지는, 처음엔 권선징악의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한 행위였지만 나중에는 자신에 반하는 모든 것을 적으로 치부하며 마침내 스스로를 신으로까지 착각하는 광기로 변질되어간다.

절대선을 독점하려드는 반영웅은 파멸한다

@BRI@<데스노트>가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것은, 저마다의 명분에 따라 선과 악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작품의 미묘한 세계관과 함께, 대량햑살자로 치닫는 주인공 야가미 라이토의 모습이 왠지 국가주의에 의한 집단 최면을 강요하던 과거 일본 군국주의나 나치 독일의 히틀러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만일 야가미 라이토가 아닌 쿠로사기나 이이다 쿄야, 원한해결사에게 <데스 노트>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데스 노트>는 반영웅의 극단을 보여주는 작품인 동시에, '힘에 의한 정의'의 허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야가미 라이토가 다른 폭력적인 반영웅 캐릭터들보다 훨씬 위험한 것은 그가 '절대선'을 독점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 이이다 쿄야나 원한해결사, 쿠로사기는 스스로의 정의를 절대선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며, 자신을 학대하여 굳이 인위적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도 없다. 다만 정해진 원칙에 따라 자신의 눈앞에 던져진 부조리를 응징해나갈 뿐이다.

반영웅의 매력은 선과 악의 경계선에 걸쳐있는 인물의 기묘한 이중성에 있다. 권선징악을 꿈꾸던 영웅에서 광기의 독재자로 변질되어버린 라이토와 달리, 이이다 쿄야나 원한해결사가 파멸하지 않는 것은 끝까지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쿨함에 있다.

혼란스럽고 어두운 시대일수록, 원칙과 규범에 얽매여서 손해를 보는 착한 영웅보다는 세상의 질서를 조롱하는 '나쁜 영웅'들의 활약에 대한 선망과 동경도 높아진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