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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8일 베트남 하노이의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 때에 노무현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동해'나 '일본해' 대신 '평화의 바다'라는 중립적 명칭을 제안했다는 사실이 <세계일보>에 보도된 이후 국내외적으로 파장이 확대되고 있다.

'평화의 바다' 제안이 알려짐에 따라 가장 곤혹을 겪고 있는 쪽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외교통상부 등 외교라인과의 사전 협의 없이 국가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 단독 제안을 했다는 점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 국민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당당한 대일외교를 포기하고 일본측과 타협을 이루려 했다는 시각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BRI@'평화의 바다' 제안에 앞서 정부 내 절차를 거치지 않고 또 국민적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청와대 참모진들도 그 문제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청와대 측이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세계일보> 보도 이후의 국제적 분위기를 고려해 보면, '평화의 바다' 제안이 동해 표기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측에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절차상 잘못 등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청와대가 사전에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 이 문제가 일본측에 결코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해 표기 문제'와 '독도 영유권'이 정반대의 입장에 놓여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도 영유권이 '문제'로 비화되면, 이는 독도에 대한 한국의 '공연하고 평온한 점유'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는 누구나 다 특정 물건에 대한 자기의 소유권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의문시 혹은 쟁점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이 국제 법정에서 독도 영유권을 가리자고 하는 것도 한국의 독도 점유에 대해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를 붙이려는 의도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 유리한 입장에 있는 한국으로서는 굳이 이 문제를 국제쟁점으로 비화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일본의 문제제기에 대해 비판을 가하되, 독도 영유권이 국제쟁점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해 표기 문제'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일본측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 국제수로기구(IHO)가 1929년판 <해양과 바다의 경계>라는 책자에서 동해(East Sea)를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한 이래로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다.

일본과 대립적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못지않은 반일감정을 갖고 있는 중국에서도 동해 대신 일본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서울에서 판매되는 중국 수입서적인 <간명 중국역사 지도집>에도 일본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 책은 중국의 사회과학원이 간여하고 중국지도출판사가 출판한 것이다.

▲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는 중국의 <간명 중국역사 지도집>.
ⓒ 중국사회과학원 및 중국지도출판사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일본해라는 표현이 훨씬 더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은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이 문제에 관한 한 유리한 입장에 있는 일본으로서는 이것이 국제쟁점으로 비화되는 것을 꺼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해 표기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되고 또 '일본해' 표기의 정당성이 의심 받는 분위기가 국제적으로 조성되면, 이는 일본보다는 한국에 더 유리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일보>의 전격 보도로 인해 국내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공격을 받고 있지만, 국제적 분위기를 보면 오히려 뜻밖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뜻밖의 효과'라는 것은 세계 여러 나라들이 동해 표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 한·일 양국 간의 분쟁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원치 않는 '일본해 표기 문제의 국제쟁점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음을 보여 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세계 각국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보도를 내보내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 '평화의 바다' 제안과 관련하여 동해-일본해 분쟁을 소개하고 있는 세계 언론.
먼저, 중국 언론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비공식 제안을 '건의' 혹은 '제의'로 표현하면서 사건의 경과과정에 대해 비교적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 언론에서는 한국이 '화평의 바다'(和平之海)라는 명칭을 제안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평화'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는 대신 '화평'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1월 9일자 <인민일보>에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쟁의해역(爭議海域)을 서울 측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도쿄 측에서는 일본해라고 부르고 있다"면서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해역의 최초의 명칭은 동해였다고 꾸준히 주장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사진 세트 첫줄 왼쪽)

1월 8일자 <미국의 소리> 중문판에서는 "이 수역의 명칭을 둘러싼 쟁의는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긴장시키는 여러 원인 중 하나"라고 소개하였다.(사진 세트 첫줄 오른쪽)

<화상망>이나 <성도 환구망> 같은 다른 중국 인터넷 매체 등에서도 동해 표기 문제에 관해 관심 있게 보도하고 있다(사진 세트 둘째 줄).

그리고 현지 시각으로 8일자 < CNN 인터내셔날 > 홈페이지에서는 이번 사건을 간략히 소개한 뒤에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이 1910~1945년의 가혹한(harsh) 한반도 지배에 대해 적절한 회개(contrtion)를 하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종종 일본을 질책(chastise)했다"고 말하였다.(사진 세트 셋째줄 왼쪽) 이는 서양인들이 동해 표기 문제를 식민통치 문제와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주의 <시드니 모닝 헤럴드> 8일자(현지 시각) 기사에서는 "남한에서는 이 해역의 적절한 명칭이 동해라고 주장하면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일본해라는 이름과 뜨거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소개하였다(사진 세트 셋째줄 오른쪽). 일본해라는 명칭의 타당성에 관한 의문이 한국측으로부터 제기되고 있음을 소개한 것이다.

한편, 영국의 < BBC 뉴스 > 홈페이지에서는 '해역 분쟁'(sea dispute)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외에도 인도의 <데일리 인디아> 등 각국 언론도 이 문제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표출하였다(사진 세트 넷째줄).

위와 같이, '일본해'라는 표현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던 세계 각국에서 동해 표기에 관한 한국의 입장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나아가 이 문제가 식민통치와 관련이 있다는 내용까지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보도는 일본해라는 명칭의 정당성에 대해 국제적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당장 일본해에 대해 뚜렷한 이의가 제기되지는 않고 있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가 동해 표기 문제의 국제쟁점화에 유리한 여건을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의외의 효과가 생기고 있는 것은 이번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의 방식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한국 정부가 동해 표기 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했다면, 일본 정부의 방해 때문에 쉽사리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이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에 세계 언론이 관심을 갖고 보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이 절차상 하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 문제는 의외로 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문제제기와 별도로, 동해 표기 문제를 국제쟁점화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일본해라는 표현에 물음표가 찍힐 수 있도록 이번 문제에 접근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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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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