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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티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대(1837~1901)의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초강대국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 당시 권력 헤게모니는 부르주아 중산계급이 쥐고 있었다. 이들은 투철한 청교도적 윤리를 바탕으로 지나친 엄숙주의를 주창, 사회적으로 정숙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19세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피아노 다리도 외설적이라고 여겨 덮개를 씌었던 사회적 배경을 가진 시대에도 믿어지지 않지만 '길거리 캐스팅'이 있었다. 길거리 캐스팅은 연예기획사가 말 그대로 길거리에서 미래의 스타를 발굴하는 것이다. 엄숙주의가 짓누르던 19세기 영국의 도심 네거리에서 이 같은 행위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前派) 화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당시 영국의 미술은 억압적인 사회구조와 맞물려있었다. 작가들은 왕립미술원의 지침에 따라 엄격한 공식과 편협한 미학규범에 얽매여 감동은 없고 기교만 충실한 작품을 양산했다. 라파엘전파는 이러한 형식주의를 탈피하고 초기 르네상스 시대(라파엘 이전의 시대)의 미학적 단순성과 도덕적 상실성을 회복하기 위해 로제티, 헌트, 밀레이 등 젊은 화가 3명이 뭉쳐서 만든 것이다.

이들은 형식주의를 피하기 위해 전문 모델이 아닌 아마추어 모델을 찾아 나섰고 왕왕 길거리 캐스팅에 나서서 목적을 달성하곤 했는데, 데브라 N. 맨코프가 쓴 <최초의 수퍼모델> 주인공 제인 모리스(1839~1914)를 이때 만난다. 제인의 모델 기용은 라파엘전파의 기존 사회 권력에 대한 반동을 대변하는 도구로 해석된다.

'비범한 재능'을 가진 독특한 미인

@BRI@미인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당시 미술 모델의 기준은 금발, 하얀 피부, 파란 눈 등 기본 삼박자를 갖춰야 했다. 이에 반해 제인은 피부도 눈도 검고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 윤곽이 지나치게 뚜렷했다. 이국적 아름다움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영국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제인은 19세기 라파엘전파의 거의 모든 그림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이로 인해 평범한 한 여인에게 '비범한 재능'이라는 꼬리표를 단다.

라파엘전파 삼인방 가운데 특히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1828~1882)는 열여덟 살 그녀를 모델 세계로 이끈 장본인이다. 후에 로제티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비범한 재능"이라고 표현했다. 화가면서 시인이기도 했던 로제티는 그녀를 동료 시인인 윌리엄 모리스(1834~1896)에게 소개시켜서 결혼에 이르게 했으며 그 후로도 10여 년간 그녀를 모델로 세웠다.

로제티에게 있어서 그녀는 중세의 여왕이나 고대의 여신이었다. 미술은 로제티가 그녀에게 구애하고 숭배하는 훌륭한 도구였다.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발굴한 모델을 통해 사회적 억압을 극복하려던 한 화가의 일생이 외려 한 여인에 대한 숭고한 사랑으로 얽매이는 묘한 구도를 만들었다.

제인 모리스의 삶이 비단 로제티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란 점에서 그녀는 당대의 슈퍼모델로 불릴만하다. 사람들은 로제티의 그림을 통해서만 그녀를 만났지만 그녀의 스타일, 옷 입는 방식, 나른해 보이는 우아함, 정열적인 표정 등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런던의 고급상점들은 '예술적인 옷'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제인의 느슨한 옷 입기를 따라갔다.

19세기 영국 문화예술의 아이콘

제인 모리스의 실제 모습(좌)과 그것을 참고해서 그린 것으로 짐작되는 작품 <몽상>(1868년).
제인 모리스의 실제 모습(좌)과 그것을 참고해서 그린 것으로 짐작되는 작품 <몽상>(1868년). ⓒ 애슈몰리미술고고학박물관
헨리 제임스부터 조지 버나드 쇼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그녀의 신비스런 이미지를 글로 남겼으며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반면 제인은 그러한 사회적 관심에서 한 발짝 비켜선 채 거울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나드 쇼에 따르면 "대부분의 여자들을 망쳐놓을 만한 우대를 받으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가진 여자"라고 평했을 만큼 실재와 그림속의 자신의 이미지를 명확히 구분한 그녀였다. 그녀는 '비범한 재능'이 특권인 동시에 부담스런 짐이며 즐겁게 누릴 수 있는 선물일 뿐 아니라 견뎌야 하는 조건임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했다.

한 번쯤은 두툼한 입술에 검정 웨이브 머릿결을 가진 그녀를 마주쳤을 것이다. 워낙 강렬한 인상을 가졌기 때문에 머릿속에 깊이 각인됐음직하다. 1914년 1월 28일 런던의 <타임>은 그녀의 부고기사에서 "세상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서도 압도적인 부풀어 오른 검은 머리, 상아빛 얼굴색, 절묘한 얼굴 생김새, 아름다운 손, 그리고 커다란 회색 눈을 안다"고 명성을 기념하면서 그녀가 가진 외관상 특징을 묘사했다.

최초의 길거리 캐스팅으로 명성을 얻은 슈퍼모델 제인 모리스. 당대의 미술 사조의 중심 모델로, 또 한 시대의 문화예술 아이콘으로서의 삶 속에서 그녀에게 덧입혀진 '시선의 무게'를 줄이는 지혜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라파엘전파 미술사조를 전공한 저자가 제시하는 전문적인 견해가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덧붙이는 글 | 최초의 수퍼모델

글쓴이 : 데브라 N. 맨코프 
옮긴이 : 김영선 
펴낸곳 : 마티 
펴낸날 : 2006. 7. 15 
쪽수 : 233쪽 
책값 : 1만7000원


최초의 수퍼모델 - 시대를 사로잡은 아름다움

데브라 N. 맨코프 지음, 김영선 옮김, 마티(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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