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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등산로 옆에 만들어 놓은 동물들의 피난처 움막
아차산 등산로 옆에 만들어 놓은 동물들의 피난처 움막 ⓒ 이승철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선배님들에게 먼저 인사를 드려 두라고."
"그러지 뭐. 오징어포에 소주 한 병 사들고 가면 되는 겨?"

궁금하실 것이다. 요즘 세상에 소주 한 병 달랑 사들고 선배에게 인사하러 가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도 내 다정한 친구들인 등산 삼총사 중에 아직 선배님들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한 친구가 있어 2006년도가 3일밖에 남지 않은 지난해 12월 29일 선배 망자들의 도시를 찾아 등산길에 올랐다.

@BRI@서울과 경기도 구리시를 가르며 동북쪽으로 길게 가로누워 있는 산. 한강 물줄기를 차고 올라간 아차산에서 시작하여 용마산 바위봉우리로 불끈 솟아 서울을 굽어보고, 구리시를 줄기줄기 싸안으며 수많은 무덤들이 자리 잡은 망우산. 그 줄기는 높지는 않지만 한강과 서울 시가지를 바라보는 조망이 일품인 산이다.

등산의 시작은 아차산부터다.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에서 내려 워커힐 아파트를 거쳐 오르는 등산로는 길도 좋고 산도 높지 않아 산책하는 정도로 부담이 없다.

아차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옆에는 베어낸 나무들을 얼기설기 세워 놓은 작은 움집 같은 것들이 보인다. 눈 쌓이는 겨울철 동물들의 피난처로 만들어 준 것 같은데 등산로 가까이 만들어 놓아 실제 동물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전시효과를 노린 듯하여 보기에 씁쓸하다.

아차산은 그 옛날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한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맞서 싸우던 지역이어서 특히 고구려의 유적들이 많은 곳이다.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도 있는 산이 아차산이다. 고구려군이 주둔했었던 보루 이곳저곳을 파헤쳐놓은 발굴현장도 보인다. 아차산을 지나 용마산으로 접어들면 산세가 조금 달라진다.

망우리 추모공원 묘역 길옆의 멋진 정자
망우리 추모공원 묘역 길옆의 멋진 정자 ⓒ 이승철
용마산은 아차산과 달리 대부분 바위산이다. 중곡동 쪽으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정상에 올라서면 발아래 펼쳐진 시가지가 남산까지 시원하다. 멀리 삼각산과 도봉산이 아스라한 모습이고 중랑천이 한강으로 이어져 흐르는 모습도 보인다. 뒤돌아 나와 망우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용마산 헬기장에서 바라보는 한강도 볼만 하다.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 협곡을 가로막은 팔당댐은 보이지 않고 그냥 남한산성 쪽으로 광주산맥이 이어져 보이는 풍경도 장관이다. 용마산과 망우산을 잇는 작은 고개를 넘어서면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이곳부터는 묘지지역이기 때문이다.

길 양편에는 크고 작은 무덤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양지바른 곳의 무덤들은 노랗게 마른 잔디가 포근한 모습이다. 그러나 응달의 무덤들은 아직도 하얀 눈이 덮여 추워 보인다. 상당히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석물들이 즐비한 호화무덤이 있는가 하면 작고 초라한 무덤들도 많다.

"무덤들을 보니 죽어서도 빈부의 격차가 심하구먼."

일행 한 명이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찬다.

"저 커다란 무덤이 부럽기라도 하단 말이야? 다 부질없는 생각이야. 저 무덤 속에 들어가고 나면 크고 작은 것, 초라한 것이나 화려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하긴 저런 무덤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역시 산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욕심이겠지."

시계방향으로 망우산 제1보루, 눈덮인 무덤, 발굴중인 제3보루, 한강풍경
시계방향으로 망우산 제1보루, 눈덮인 무덤, 발굴중인 제3보루, 한강풍경 ⓒ 이승철
일행 둘은 양지쪽 길가에 있는 작고 초라한 무덤가에 앉아 준비해 가지고 간 소주병을 꺼냈다.

"선배님 추운데 한잔 드시지요?"

두 사람은 술을 나누어 마시기 전에 먼저 한 잔씩을 따라 무덤 위에 뿌렸다. 이들은 이것으로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선배에게 인사를 차린 셈이었다.

아 벌써 가느냐고 언제 또 오느냐고
무덤 속에 벗은 쓸쓸한 얼굴을 한다.

- 김광균의 2행시 '망우리'


능선길에서 왼쪽인 서울 쪽 산자락은 서쪽이어서 응달이고 무덤들도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오른편 구리시 쪽 산자락은 동쪽 양지지역이어서 무덤들이 많았다. 무덤 옆에는 무덤을 관리하기 위한 일련번호를 적은 작은 콘크리트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중에 어떤 무덤 옆에는 20만 번이 넘는 번호가 적혀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역사적인 인물들의 무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로 대통령후보에 두 번이나 출마했지만 보안법에 따라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가 나타났다.

다음에는 독립운동가이며 근대 미술사의 아버지라는 위창 오세창, 역시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 사학자였던 호암 문일평, 송암 서병호, 소파 방정환, 그리고 만해 한용운과 우두를 보급한 송촌 지석영의 묘도 보인다.

시계방향으로 한용운 지석영 문일평 조봉암 묘
시계방향으로 한용운 지석영 문일평 조봉암 묘 ⓒ 이승철
동쪽으로 편편한 길가에는 날아갈 듯 멋진 정자도 서 있고 그 옆에는 몇 사람의 어록을 기록한 비도 세워져 있다.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필연의 공리요 철칙이다." - 호암 문일평
"글과 그림이 대대로 일어나 끝내 사람에게서 없어지지 않은 것은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는 성품이 비슷하고 사물의 근원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에 솔거 이하 근대 사람에 이르기까지 서화를 밝혀놓고 높고 낮음을 품평하였다." - 위창 오세창

"우리 가족에게 먼저 실험해보아야 안심하고 쓸 수 있지 않겠느냐." - 송촌 지석영
"내가 있기 위해서는 나라가 있어야 하고, 나라가 있기 위해서는 내가 있어야 하니, 나라와 나와의 관계를 절실히 깨닫는 국민이 되자." - 송암 서병호


모두 암울했던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들의 말이어서 가슴 뭉클한 여운을 남긴다.

"그나저나 이 묘지 생각보다 대단하구먼, 요즘은 줄었지만 본래 20만기가 넘었었던 모양인데, 20만 인구면 상당히 큰 도시잖아? 망자들의 대도시구먼."
"정말 그런데, 한 시대를 앞서간 유명 선각자들의 무덤도 많고…."

지난 2004년 문화재위원회는 애국지사와 문인, 유명예술가들이 묻힌 서울 망우리 추모공원을 근대문화재로 등록할 것을 추진한다고 했었다.

"죽음 저편에서 /꽃이 일어서고 있다 /지하에서 들려오는 피아노소리 /쓸쓸한 곡조의 기타소리 /어디서 낯익은 해골 하나가 /마지막 남은 햇빛을 걷고 있다 /헐벗은 채 삽화처럼 서있는 나뭇가지에 /검은 달이 부서져 내린다. /달빛을 차단한 기인 그림자 /목마에 실려 떠난 뼈 하나를 불러 세운다. /의식의 심층에서 스스로 타면서 숯이 되는 주검들 /더러는 흘린 살점들이 달빛을 찢으며 강물 위를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허무의 깊은 바다로 /여린뼈의 구름이 되어 천공을 배회하고 /아아 잠들지 못하여 늦도록 펄럭이는 살점들 /내리는 빗발이 되어 아버지의 수염처럼 따갑게 /내 볼을 부비고 있다.

역시 이 묘지에 잠들어 있는 박인환 시인의 시 '망우리에서' 전문


무덤번호 202508번
무덤번호 202508번 ⓒ 이승철
"어때, 선배님들을 처음 뵌 소감이?"
"허허 소감은 무슨, 덕분에 우리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는 거지.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

세 시간을 걸어 구리시로 내려가 정말 오랜만에 소머리국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다음 2월부터 매달 받는 국민연금 중에서 5%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내놓기로 작정했어."

점심에 곁들인 소주 몇 잔으로 불그레한 친구의 얼굴이 이날따라 더욱 소박한 다정함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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