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수업을 한 후에 가슴에 충만감이 밀려옵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제게 주는 선물입니다.
ⓒ 이승숙
요즘 아이들에게 우리들이 클 때 이야기를 해주면 애들은 이해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 땐 왜 그렇게 돈이 귀했는지 내 나름대로 설명을 해줘도 애들은 통 이해를 못 한다.

1970년대, 그 때는 돈이 참 귀했다. 촌에서 돈을 만들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농사지은 곡식을 내다 팔아서 돈을 만들거나 봄가을로 누에를 쳐서 목돈을 만들기도 했다. 그 외에도 돈 될 만한 것들은 다 내다 팔았다. 그래서 계란 한 알도 마음놓고 먹어보지 못했다. 계란마저도 돈을 사기 위해서 장에 내다 팔았던 것이다.

그 당시 촌에서는 딸자식은 공부 많이 시켜봐야 소용없다고 했다. 시집 보내면 남의 식구 되는데 공부 시켜봐야 뭐 하냐고 그랬다. 집이 특별하게 잘 산다거나 아니면 특출하게 공부를 잘 해서 교육대학이라도 가지 않는 이상 여자 아이들은 대학에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물론 쉽게 간 건 아니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면 단위의 시골 고등학교였다. 남녀 합해서 3개 반밖에 없었던 작은 학교였다. 나는 그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목표를 정해두고 공부에 매진하지는 않았다.

어려웠던 그 시절, 대학은 꿈도 못꿨다

@BRI@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꿈이 없던 우리들에게 "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에 못 간다고 미리 못박지 마라, 일단 공부를 해라, 공부를 잘 하면 길이 열릴 수도 있다"고 늘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말이 가슴으로 깊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학교 시험보다 모의고사 같은 외부 시험을 잘 쳤다. 학교에서 보는 시험은 선생님이 내주시는 프린트물을 좔좔 외우기만 하면 일정 수준의 점수가 나왔지만 모의고사 같은 거는 기본 지식이 없으면 잘 못 보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학교 공부만 한 아이들은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지만 책을 많이 본 아이들은 모의고사에서 항상 좋은 점수를 내곤 했다.

11월이 되자 학력고사를 보았다. 나는 도시 아이들에 비하면 높지 않은 점수였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3번째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은 나더러 점수가 아깝다며 대학에 가라고 권하셨다. 국립대학은 돈이 많이 안 든다며 나에게 적당한 학교를 추천해 주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시기 시작했다. 점수가 아깝다며 대학에 원서나 내보자고, 대학에 못 보내더라도 붙으면 일단은 기분이 좋지 않느냐시며 원서나 내보자고 그러셨다.

나는 선생님이 권해 주신 대학의 학과에 지원을 했고 그리고 합격을 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은 또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못 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딸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시원하게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등록 마감일을 하루 앞둔 날 밤에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언니가 왔다. 언니는 울면서 아버지에게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부지요, 승숙이 대학 보냅시더. 입학금만 대 주이소오. 용돈은 제가 대겠십니더."

나보다 세 살이 더 많은 우리 언니는 문재도 뛰어났고 공부도 잘 했다. 하지만 언니는 집안의 장녀였는지라 고등학교를 상업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중학교를 다닐 당시에는(1970년대 초반) 돈이 있는 집 딸들이나 인문계 고등학교를 갔지 보통 집 딸들은 대부분 졸업 뒤에 바로 취직할 수 있는 상업계 고등학교를 갔다.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한 동안 고등학교 교과서를 안고 살았다. 대학에 가고 싶어서 늘 공부를 했다. 하지만 끝내 언니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언니는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걸 동생을 통해서라도 이루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는 언니의 간청 덕분에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선생님과 언니 덕분에 대학에 간 나

▲ 글쓰기는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지요.
ⓒ 이승숙
어렵게 대학에 갔지만 나는 졸업 뒤에 변변한 직장을 다니지 못했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자 나는 보통의 주부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되어갔다. 학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다더니 공부를 멈추자 나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나를 돌아봤다. 무기력하고 아무 꿈도 없이 사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거 역시 한 가지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우울했고 비참했다.

1993년 초가을 어느 날, 아침을 먹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독서지도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나와서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저거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세상에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거 같았는데 나는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거를 찾은 거였다.

바로 다음 날 신청을 했다. 그리고 1년간 독서 지도와 논술 공부를 하러 서울로 다녔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했고 아이들 가르치는 걸 좋아했다. 독서지도는 그 두 가지가 다 따라오는 거였다. 그래서 내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고 내 몸에서는 활력이 넘쳐났다. 그렇게 아주 신명나게 몇 년을 살았다.

무기력했던 나, 아이들을 가르치며 다시 깨어나다

▲ 가르치는 선생과 배우는 학생 모두가 재미있고 즐거운 수업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 이승숙
그러나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자 타성에 젖게 되었다. 나를 살 맛 나게 해주었던 그 기쁨들을 다 잊어버리고 나는 돈을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다 돈으로 보였고 수업 역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져 갔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일을 그만두면 남편 혼자 버는 돈으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미적미적 계속 일을 했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내 몸은 아주 약해져 버렸다. 몇 달씩 계속 하혈을 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수술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 곁에서 간호해줬던 남편은 이러다간 마누라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시골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시골로 이사를 했다. 나는 위기를 겪고서야 비로소 일을 놓을 수 있었다.

강화로 이사를 한 후에 자연에 취하고 사람에 흥감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내 인생에 이 이상 더 좋은 날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그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연습을 했다. 남의 눈으로 보는 내가 아닌 내가 사랑하는 나를 찾아갔다.

그러나 문득문득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기 이름으로 사는 여성들을 만나면서 나도 누구 엄마가 아닌 내 이름으로 불리워졌으면 싶었다. 그러나 마땅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독서지도, 곧 논술을 하면 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시골인지라 논술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기회가 찾아왔다.

시골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싶다

▲ 어미 닭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부리로 살짝 알껍질을 쪼아줍니다. 그러면 병아리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알을 깨고 나오지요.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길을 가르쳐 주는게 바로 선생이 할 일이지요.
ⓒ 이승숙
강화중학교(교장 이조욱)는 2006년 3월부터 '학습자의 수준을 만족시키는 방과 후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 사회의 다양한 인적 자원과 시설들을 이용해 학생들이 학교 교육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이 방과 후 학교에서 논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학생들 곁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도시와 달리 시골 아이들은 거의 혼자서 공부를 한다. 보습학원이 있지만 읍내에만 있기 때문에 면 단위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 수업 이외에는 달리 배울 데가 없다. 그래서 방과 후 학교에서 배우는 게 거의 유일한 '과외 수업'이다.

나는 논술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원고지 쓰는 법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장력을 기르고 문단을 확장해 가면서 글쓰는 힘을 길러 주었다. 글쓸 게 없다고 고민하던 아이들이 글쓰기가 너무 쉽고 재미있다는 말을 할 때면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뿌듯한 마음을 느끼곤 한다.

글쓰기는 자신감을 키워준다. 공부를 잘 못 하는 아이들의 경우 그 동안 어느 누구한테서고 주목받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주눅이 들어서 자기표현도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재능들을 발견하게 되면 자신감과 함께 자존감도 가질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믿고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게 바로 글쓰기의 가장 큰 장점이다.

지금 나는 강화중학교 및 강남 중학교, 그리고 심도중학교까지 방과후학교 논술 강사로 나가고 있다. 매일 매일 첨삭 지도해야 할 글들이 많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그리고 사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시골 아이들에게 내가 가진 것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참 고맙다.

인생은 끝없는 배움의 길이라고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을 통해 배우기도 한다. 배우고 익히면서 앞으로의 내 나날들도 곱게 가꿔가고 싶다.

덧붙이는 글 | '2006, 나의 특종'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