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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희
음악쇼에서 잔시 여왕 역을 맡은 소녀. 머리가 부스스하다
음악쇼에서 잔시 여왕 역을 맡은 소녀. 머리가 부스스하다 ⓒ 왕소희
지니의 여행 가방 안에는 희한한 게 하나 들어 있었다.
바비리스. 전기로 뜨겁게 달궈서 곱슬머리를 쭉쭉 펴주는 기계 말이다.

"난, 이게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가."

지니는 머리가 산만한 동네 소녀들을 붙잡아다 바비리스로 머리를 펴주었다. 강가로 갈 때 가끔씩 감는 소녀들의 머리는 엉켜서 빗이 들어가면 부러질 듯했다. 게다가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엉킨 머리는 부풀 대로 부풀었다. 또 강렬한 햇볕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태웠다. 지니나 내 머리 꼴도 엉망이었지만 소녀들은 우리 머리칼을 붙잡고 말했다.

"실키 바르! (실크 머리다)"

그런 소녀들의 산만한 머리를 바비리스로 쭉쭉 펴서 젖은 미역처럼 살랑살랑하게 만들어 놓으니 이번엔 동네 아줌마들이 난리가 났다.

"어머머,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지니, 내 머리도 해줘 봐!"

아줌마들도 반듯 반듯 펴지는 머리를 보며 웃음꽃을 피웠다.

"인도에선 말이지. 신부 감을 고를 때 세 가지를 보거든. 피부색이랑, 얼굴이랑, 그리고 머릿결이지. 피부는 하얄수록 좋고 얼굴은 예쁠수록 좋고 머릿결은 이렇게 고울수록 좋지."

미누 엄마, 가네시 엄마, 잔끼 엄마는 깨진 거울 조각을 들여다보며 만족해 했다. 나도 깨진 거울 조각 하나를 벽 틈에 끼워 놓고 이리저리 비춰봤다.

"근데 나 너무 촌스러워. 못 참겠다. 아주."

여긴 미용실 없나?

멋내기를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
멋내기를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 ⓒ 왕소희

그래서 미용실 '뷰티 팔라(beauty palor)'로 끌려갔다.

"넌 앞머리 내려서 조금만 잘라주면 예쁘겠어! 이 동네 사람들은 전부 여기서 머리하니까 걱정 마!"

동네 최고 미용사라는 프리띠. 그녀는 우리 친구인 학교 선생 모나의 언니이기도 했다.

프리티's 뷰티팔라. 비틀 비틀한 계단을 올라가 낙서가 잔뜩 인 허름한 건물 안으로들어가니 꽤 분위기가 갖추어진 곳이었다. 커다란 거울도 있고 여성용 속옷과 매니큐어도 팔고 있었다. 최고의 미용사 프리티는 내 머리를 한참 째려보더니 쓱싹 쓱싹 가위질을 했다. 그런데 앞, 뒤, 두 번. 그것이 전부였다.

"어머머! 메이, 일본 인형 같아!"

두 자매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하지만... 하지만 내가 보기엔 사탄의 인형 같았다!

그 머리 스타일 때문에 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어머머, 언니 머리가 왜 그래요? 너무 웃겨요. 숱도 많은데 그렇게 잘라놓으니까 더부룩 답답해요. 큭큭..."

언덕 위로 올라오는 여행자들은 촌스런 내 머리 스타일을 놀리며 즐거워했다.

며칠동안 나는 언덕 뒷쪽에 앉아 있었다. 머리 스타일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져서 일도 하지 않고 햇볕이나 쪼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언덕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 사이에 고깔처럼 뾰족이 솟은 두 개의 산을 볼 수 있는 곳.

'언젠가 새벽에 가벼운 배낭을 메고 저 산에 올라가 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할 거야. 이런 머리 꼴로 돌아다닐 순 없잖아. 나는 속상해 죽겠는데 하늘과 들판은 예뻐 죽겠네.'

거대한 구름, 끝없는 들판, 먼 데서 불어 온 바람. 나를 둘러싼 풍경은 아름다운 데다가 물감 통을 흔들다 화악 쏟아 놓은 것처럼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때 언덕 아래서 강 쪽으로 가는 긴 행렬이 보였다. 이십 여명 되는 동네 사람들은 모두 민머리였다. 아까부터 사라졌던 나를 찾으러 온 람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했다.

"어젯밤 라자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까까 어르신부터 꼬마 라다까지 모두 머리를 밀었어. 인도에선 사람이 죽으면 가족, 친지들이 머리를 밀고 슬픔에 잠기거든. 시체는 강으로 띄워 보내고."

햇볕아래 반짝 반짝 거리는 민머리로 천에 둘둘 만 시체를 메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왜 머리카락을 밀지? 머리카락이 뭐라고."

"메이, 스님들도 출가할 때 삭발을 하시지? 머리카락은 기나긴 과거를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길면 길어질수록 집착하는 몸이 아닐까? 그래서 머리를 미는 걸 거야. 하지만 그건 그냥 육체일 뿐이야. 우리는 영혼을 더 소중히 하면 돼."

갑자기 수 만개의 머리카락이 목을 죄는 듯하여 머리카락에 대한 집착은 그만두기로 했다.

시골마을 풍경
시골마을 풍경 ⓒ 왕소희

해질 무렵 내 작은 진흙집 앞은 시끌벅적했다. 나는 착한 아이처럼 흰 천을 목에 두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신기한 듯 주위에 모여 깔깔 웃었다.

"우리 엄마가 미용사였거든. 그러니까 날 믿어. 잘 고쳐 줄게."

지니는 문방구에서 사 온 가위로 허공에 짝짝 가위질을 하더니 내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엄마가 미용사? 외계인은 아니니 다행이다. 잘 될 리는 없겠지만 맘대로 해.

내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것이다. 우주는 변할 것이다. 나는 다시 새벽에 배낭을 메고 두 개의 고깔 산을 오르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약일까?

ⓒ 왕소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 행복닷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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