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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교과서에 나와 있어 내신이나 수능 대비용으로 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시조가 있다. 그리고 그 시조가 표현하는 처량한 이미지로 인해, 비단 배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많은 국민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시가 있다.

@BRI@오백 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야은 길재 -


위 시조는, 길재가 고려 멸망 후 옛 도읍지였던 송도(개성)를 돌아보면서 슬픔에 잠긴 채 지은 시다. 비록 세 줄 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고려 멸망에 대한 비극적인 슬픔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어디 고려 멸망뿐이겠는가. 신라 멸망도 고려 멸망만큼이나 비극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어쩌면 고려보다도 더 나쁠 수 있겠다. 내부 정치 구조의 모순에 의한 붕괴는 시대적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치더라도, 후백제군이 수도에 쳐들어와 경애왕을 직접 죽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 포석정 입구
ⓒ 한대일
하지만 그렇게 비참하게 무너져 간 신라이지만, 유럽 사람들이 2천년 역사의 로마 제국을 그리워하듯이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신라의 천 년 역사를 동경했다. 그 유명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부터 옛 신라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벌이고 있는 사학과 고고학의 중심 역시 신라에 두고 있다.(물론, 요즘은 고구려, 백제, 가야에도 관심을 두고 있으나 아직 주류는 신라에 대한 연구라 볼 수 있다.)

▲ 포석정 경내
ⓒ 한대일
신라시대 여러 사건에 대한 다방면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 중 하나가 신라 멸망에 대한 연구이다. 멸망 원인은 내부적으로는 골품 제도의 뿌리 깊은 모순, 외부적으로는 호족 세력의 성장이 그 원인이다. 골품 제도로 인한 6두품 인재의 유출, 가혹한 수탈로 인한 농민 반란 등 침체기를 겪던 신라는 927년에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의 공격을 받고 급속히 그 세가 기울어졌다. 그 역사적 현장이 바로 포석정이다.

포석정, 경주 답사 출발점이자 종착점

사적 제1호로 지정되어있는 포석정은 경주 답사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될 수 있는 곳이다. 서남산 자락의 답사지로서는 종착점이요, 남산의 답사지로서는 출발점이 바로 포석정이다. 꼭 이런 교통의 요지(?)라는 요인이 아니더라도 포석정은 첨성대, 불국사만큼이나 잘 알려진 경주의 대표적 관광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 포석정 돌홈
ⓒ 한대일
신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은 견훤의 침공이라고 많이 말한다. 물론 견훤이 수도인 경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왕까지 죽였으니 이는 신라에게 심대한 타격이라 하겠다. 그러면 그 '침공'의 원인은 뭘까.

비록 허약해졌다곤 하나 그래도 경주는 한 나라의 수도로서 방비가 약하진 않았을 것이다. 후백제군이 신라 수도인 월성까지 와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을 때, 관련 보고가 충분히 경애왕에게 전해질 만큼 시간적 여유는 있었을 것이다. 경애왕은 나가 싸우든, 도망가든 어쨌든 포석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견훤은, 경애왕이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히 월성 내부로 진입했다. 일반적 상식으로 한 나라의 수도가 그렇게 빨리 무너질 순 없다. 이런 견훤의 속전속결이 단지 후백제군 만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 포석정 돌홈
ⓒ 한대일
결론적으로, 외부적 멸망 원인으로 보이는 견훤의 경주 침공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일부 신라 지배층에 의해 행해진 내부적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10세기 초 신라의 권력 체계는 뿌리부터 뒤흔들렸으니 그것은 바로 '박'씨가 왕위에 오른 일이다. 17대 내물왕부터 52대 효공왕까지, '김'씨는 무려 556년 동안이나 '박'씨와 '석'씨를 배제한 채 신라 왕위를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권력을 5세기 넘게 독점하고 있던 '김'씨에게 비상이 걸렸으니, 효공왕이 후사 없이 죽은 것이다. 수많은 화백회의가 벌어졌지만 '김'씨는 왕이 될만한 인물을 당장 내세우지 못했고, 결국 '박'씨 성을 가진 대아찬 예겸의 아들인 휘가 왕위에 올랐다. 바로 신덕왕이다. 신라의 왕위를 어이없이 '박'씨에게 빼앗긴 '김'씨는 권력을 되찾아오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고, 그 와중에 신라왕은 신덕왕, 경명왕을 거쳐 경애왕이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 포석정 돌홈
ⓒ 한대일
경애왕이 왕위에 오른지 3년 후, 고려에 지원병을 보낸 신라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후백제군이 경주로 침공해왔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이용하라는 말이 있던가. '김'씨 세력은 '박'씨 세력으로부터 빼앗긴 왕위를 되찾기 위해 후백제군의 침공을 역이용한다.

겉으로 드러난 자료는 없으나,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먼저 월성의 성문이 그리 쉽게 열린 점은 '김'씨 세력과 후백제군 간에 모종의 밀약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후백제군이 포석정까지 이르렀는데도 이 사실을 모른 채 잔치에만 몰두했던 경애왕을 통해, '김'씨 세력이 왕에게 후백제군 침공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김'씨 세력은 후백제군을 이용해서 현재 집권 세력인 '박'씨를 몰아낸 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 포석정 공원 경내
ⓒ 한대일
결국 '김'씨 세력의 소망은 바라던 대로 이루어졌다. 경애왕을 비롯한 '박'씨 세력은 후백제군에 의해 권력에서 완전히 축출당하고, 김부가 경순왕에 오름으로서 신라 왕위를 되찾아온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기 권력만을 추구한, 이를 위해 주적(主敵)까지 동원해서 기어코 권력을 되찾았다는 점은 한심한 작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신라 멸망의 외부적 요인으로 알고 있었던 후백제군의 침공도, 달리 보면 신라의 권력 구조에서 비롯한 내부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연은 견훤이 아닌, 오히려 그 견훤을 이용해서 권력을 되찾은 '김'씨 세력이라 하겠다.

▲ 지마왕릉. 포석정 주위에 있어 둘러볼 만하다.
ⓒ 한대일
많은 사람들은 어떤 한 사건의 원인을 가끔 외부적으로 돌려서, 우리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한다. 내부적 모순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인데, '재수 없게' 그 때 외적이 쳐들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 상황에 대한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잘 안되면 남 탓' 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외부적 요인도 우리 내부가 스스로 불러왔다고 생각한 채 우리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개혁을 해야 근본적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적 요인을 오로지 외부적으로밖에 바라보지 않은 채 이를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면, 역사적으로 무책임한 태도가 확산되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위 글을 쓴 필자는 '입실론 (Epsilon)'이란 필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싸이월드 페이퍼에 '입실론의 C.A & so on Travel 가이드페이퍼'를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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