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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8일 난민 지위 인정을 받은 버마의 한 가족을 만났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한국으로 온 그들을 <오마이뉴스> 인턴기자 두 명이 동행 취재했습니다. 기사는 그들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편집자주>
[추쭝씨의 이야기] "저는 버마에서 온 난민 추쭝입니다"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추쭝씨.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추쭝씨. ⓒ 오마이뉴스 이진선
제 이름은 추쭝(Chu Chung·29). 여러분이 '미얀마'라고 알고 있는 '버마'에서 왔습니다. 저는 군사정권에서 임의대로 붙인 미얀마라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아요.

@BRI@저는 버마에서도 소수민족에 속하는 쿠키(Kuki)족입니다. 지금 버마에는 160여 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버마 정부는 그 중 135개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쿠키족은 인정 받지 못한 소수민족입니다. 쿠키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박해를 받아요. 그래서 쿠키족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한국에 온 지 벌써 7년. 저는 1999년 한국의 한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취업 비자(3개월)로 들어왔지만 학비가 비싸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버마에 돌아가려 했으나 정치적인 탄압 때문에 돌아갈 형편이 되지 못했거든요. 결국 비자 없이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어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저희 아버지는 버마 정부에 쫓겨 어디에 계신지도 모릅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도 연락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지냈던 저는 다행히 지난 11월 28일 아내와 함께 난민 인정을 받았습니다. 현재 난민 신청을 해도 인정 받기 어렵다고 하는데 다들 운이 좋은 경우라고 말합니다. 다만 돌이 갓 지난 딸아이는 따로 난민 신청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난민이라고 하면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을 떠올리는데, 우리 같은 경우는 프랑스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홍세화씨와 비슷한 경우입니다. 버마에 돌아가면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거든요. 난민으로 인정이 되면 보호국의 법을 준수할 의무가 생기는 동시에 한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할 권리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난민이 되기도 쉽지 않아요. 2006년 10월 25일 기준으로 한국에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1001명이 있는데요, 받아들여진 것은 5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분명 본국으로 돌아가면 정치적 박해를 받는데도 증거가 불충분하단 이유로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더 많은 친구들이 난민으로 인정 받아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직장 없이 떠돌아다녔던 지난 날...

나의 하루는 오전 8시 30분, 회사에 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휴대폰 검사기를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갓 돌을 넘긴 딸의 배웅을 받고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지난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가족은 같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1998년 부인과 버마에서 결혼한 뒤 2개월 만에 한국에 온 제가 버마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 그것 자체로 참 기쁜 일입니다.

공장에는 저를 포함해 5명이 근무를 합니다. 공장은 휴대폰검사기를 만드는 곳으로 약 2년 전 아는 분의 소개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외국인은 저 혼자지만 사장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저를 배려해 줍니다.

이전엔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맨 처음 원단 만드는 일을 했을 때는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야간근무까지 했지만 월급은 조금밖에 못 받았습니다. 결국 2년 만에 일을 그만두고 그 후로 직장을 15번이나 옮겨다녔어요. 2003년에서 2004년 사이 1년 간은 일이 없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땐 친구 집에서 얹혀 지내거나 목욕탕, 기차역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한국어도 잘 못하고 비자 없는 불법체류자라는 딱지가 붙어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아내와 딸이 함께 있으니 힘이 납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요.

[닌닝씨의 이야기] "한국어는 모르지만 한국에 살아야하는 닌닝입니다"

집안일을 하는 닌닝씨
집안일을 하는 닌닝씨 ⓒ 오마이뉴스 이진선
저는 추쭝씨의 부인 닌닝(Neneng·28)입니다. 남편과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1998년에 버마에서 결혼했고 이제 갓 돌이 지난 딸 네이쩡(Nei Chong)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한국으로 와서 같이 산 지는 이제 겨우 1년이 좀 넘었습니다.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남편이 혼자 한국으로 떠났거든요. 남편이 없는 버마의 생활은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한국어를 거의 못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살아가기가 더욱 힘이 듭니다. 일을 구하려면 한국어를 잘 해야 하거든요. 더군다나 어린 딸 네이쩡을 돌봐야 하니 저녁 늦게까지도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매일 집안에서 사랑스런 딸과 알아들을 수 없는 텔레비전을 벗삼아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래도 한국에 사니까 한국어는 할 줄 알아야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매주 수요일, 버마 난민을 대상으로 하는 성공회대학교의 한국어교실에 나갑니다. 남편도 늦게 일이 끝나고 와서 함께 수업을 들어요. 그런데 한국어를 무척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 수업은 따라가기가 힘이 듭니다. 남편도 저도 집에서는 쿠키족의 언어를 쓰니까 배운 내용을 잘 잊어버리고요. 딸 네이쩡이 울기라도 하는 날에는 수업에 전혀 집중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한국어교실에 가는 것은 거의 유일한 정기적인 외출입니다. 버마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 일석이조이고요.

한국 살기 너무 힘들어서 떠나고 싶은데...

딸 네이쩡과 함께 밥을 먹기 전 기도하는 닌닝씨
딸 네이쩡과 함께 밥을 먹기 전 기도하는 닌닝씨 ⓒ 오마이뉴스 이진선
한국에서 생활은 무척 힘이 듭니다. 남편 월급은 130만 원인데요, 우리가족 셋이 사는 단칸방은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가 19만 원이에요. 전화비에 딸아이 우유값, 기저귀값, 병원비까지...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듭니다. 아껴 쓰려다 보니 아이 장난감 하나도 제대로 사 준 게 없고, 전화도 휴대폰은 거의 받기만 하고 공중전화 카드를 사서 씁니다.

내일은 딸 독감 예방접종하러가는 날인데, 외국인은 의료보험 적용이 안되니 너무 비싸요. 한 번 예방접종 할 때마다 5만 원, 6만 원이나 하더라고요. 이제 난민이 되었으니 의료보험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난민은 불법체류자가 아닌, 한국에서의 합법적 체류를 보장받는 사람이니까요.

적은 월급에 비싼 생활비지만 버마 정권이 바뀌면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저축을 하고 있습니다. 버마가 민주화가 계속 되지 않는다고 해도, 한국은 너무 살기 힘들어서 떠나고 싶어요. 일단은 버마와 가까운 인도로 가고 싶은데, 돈을 모아야 갈 수 있겠죠. 연세가 많으신 저와 남편의 부모님도 너무 걱정되고 뵙고 싶네요.

남편의 아버지는 집에서 살지 못하고 산에서 숨어 사세요. 살아 계실 것 같기는 한데 연락이 되지 않아요. 쿠키족이라는 것만으로도 박해를 받는데,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활동까지 함께 하니 탄압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세상은 살기에 참 억울합니다. 지금 버마 군부독재의 관계자 자식은 아침에 싱가포르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학교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된 교육, 의료 혜택을 못받고 있습니다. "돈 있어? 그럼 치료받아, 돈 없어? 그럼 죽어"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교육 역시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군부정권은 8888(88년 8월 8일 버마의 민주화운동) 이후 학교를 폐쇄하기도 했고요, 학교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버마에서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과외를 합니다. 그것도 돈이 없으면 못해요. 한국은 비싸지만 그래도 교육과 의료 수준이 높아서 좋은 것 같아요. 버마는 그렇지 못한데...

[추쭝, 닌닝, 네이쩡. 우리 가족 이야기] "오늘 민주정 되면, 내일 돌아가고 싶어요"

한글 교실에서 공부하는 닌닝, 추쭝씨 가족
한글 교실에서 공부하는 닌닝, 추쭝씨 가족 ⓒ 오마이뉴스 이진선
이제 곧 크리스마스입니다. 쿠키족은 크리스마스에 쌀로 트리를 만들고, 같이 음식을 나눠먹곤 했지요. 어렵지만 올해에도 인도에서 온 두 명의 버마 친구와 크리스마스에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니 버마가 더 많이 그리워요. 오늘 민주정 되면, 내일 돌아가고 싶어요. 그렇지만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이 상황이 참 답답하고 많이 힘이 듭니다. 딸 네이쩡이 크면서 엄마도 잘 못하는 한국어를 어떻게 배우고, 또 한국에서 어떻게 지내야할지도 막막합니다. 살다 보면 길이 보이겠죠?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기회가 되면 쿠키족이 사는 인도에라도 갔다 오고 싶어요. 크리스마스에 우린 함께 기도하고, 즐겁게 밤새 이야기한답니다. 11월에는 쿠키족만의 축제가 열리기도 하고요.

우리에게 힘을 주세요. 버마는 과거 한국의 어두웠던 지난날의 역사를 비슷하게 밟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우리의 민주화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족에게 그 자체가 가장 큰 도움과 힘이 될 것이라고 믿어요.

덧붙이는 글 | 정연경·이진선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턴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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