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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는 아니지만 한 때 동림당의 학식 높은 분들과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세간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은 몇 번 있었소. 내가 존경할만한 분들도 많았고…. 그 일에 대해서는 용추께서 더 잘 아실 것 아니오. 내가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게 만든 사람도 용추선생이니 말이오."

"변명하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는 아직 살아있지 않은가?"

@BRI@"그 말은 마치 용추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 많은 일을 해주셨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려."

"그 점 역시 부인하지는 않겠네."

"나는 지금까지 내 생명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정도로 우매하지는 않았소."

"나 역시 마찬가지네. 하지만 자네가 만났던 동림당의 그 분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

그들은 모두 숙청되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인물이 없다. 역모죄로 몰려 옥에 갇혀 사형을 당한 사람도 있고, 누군가에게 암살당한 사람들도 있다. 확실히 그들과 어울렸던 함곡이 살아있음은 용추의 덕도 있었을 것이다.

"아주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구려."

함곡이 비꼬는 듯한 말을 했음에도 용추는 여전히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함곡을 직시하며 말했다.

"나 역시 놀고만 있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네. 잠시 내 몸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겠지만 누워있다고 해서 내 머리까지 쉬고 있는 것은 아니네."

"용추께서는 한 가지 몹시 나쁜 버릇이 있소. 몸이 성치 않은 이런 상황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지는 않은 일이지만 이리 독대할 기회도 좀처럼 없을 터이니 말씀드리겠소. 내 편이 아니라면 적이라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오.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이나 의견을 인정 못하고 언제나 경쟁상대로만 인식하는 그 버릇에서부터 비롯되겠지만 말이오."

함곡의 표정에는 용추에 대한 적의가 드러나 있었다. 어차피 용추와는 불편한 관계였고, 지금까지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단둘이 있는 이런 자리라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인정하지…, 여하튼 자네 말이라면 다 인정하겠어. 다만 한 가지 부탁을 하세. 상대인과 거래하게. 그것만이 자네나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네."

"생각 중이오."

"자네가 상대인과의 거래를 거부한다면 조금 전 내가 말했듯이 이 운중보 내의 모든 일을 움직이는 사람은 바로 자네가 분명하겠지."

함곡은 피식 웃었다. 용추에게 뭔가 급한 사정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지금 운중보 내에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했다면 그럴 만도 할 것이지만….

"거래는 한 번 만나 충동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오. 더구나 목숨을 건 거래라면 말이오."

함곡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가 급하면 급할수록 거래는 유리하게 이루어지게 마련이었다.

"한 가지 사실을 먼저 알려 주지. 세상에 알려졌듯 이 운중보는 운중보주 나군백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네. 중원 역시 마찬가지지. 운중보주는 그저 표면에 내세워진 형식적인 인물일 뿐이네. 쉽게 나보주는 누군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왔을 뿐이었다네.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움직였다면 우왕좌왕한 것에 불과해."

이건 또 무슨 황당한 말인가? 그 말에 함곡은 나가려다 말고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그는 몸을 돌리거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다시 함곡의 등 뒤로 용추의 말이 들려왔다.

"그를 위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지. 자네는 곧 후회하게 될 것이네."

"여전히 재미있는 말이오. 아주 귀가 번쩍 뜨이게 하는 정보요. 물론 거래할 정보 중 그것 역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니 아주 구미가 당기는구려. 하지만 나는 말이오. 용추의 말씀을 듣고 보니 갑자기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보주를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드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소."

함곡은 끝까지 용추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용추가 준 정보는 확실히 상만천과의 거래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 터였다. 그 중 어느 하나를 던져주는 것은 용추가 선택했을 것이고, 아마 거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는 아니겠지만 가장 충격적인 정보일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죽은 쇄금도 윤석진이 말한 '보이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용추의 말을 더는 듣지 않고 방을 나서는 함곡에게는 이미 상만천과 거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용추가 존재하고 있는 한 상만천과는 동지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어차피 상만천이 거래로 내건 정보란 것은 지금 용추가 던진 말처럼 매우 충격적인 것이겠지만 그래서 더욱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확실한 패가 무언지 몰라도 분명 자신에게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아직 시간은 함곡에게 우호적이었다.


51

"청량 그 친구…, 왜 우리에게 감추는 것일까?"

성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자 중의가 물었다.

"무엇을 말인가…?"

"생존자가 없다는 말 말이네. 자네도 한두 번 본 적이 있을 걸? 단혁의 뒤에 서 있던 작은 체구를 가진 아이 말일세."

그 말에 운중보주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군. 그가 아마 혈간의 숙수라고 했지?"

"그렇다네. 입이 까다로운 혈간이 십수 년 전부터 데리고 다닌 아이였네. 아마 운중보에도 두세 번 정도 왔을 걸?"

"삼 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네. 그때 혈간이 데리고 온 것 같으이….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생존자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기억력이 좋고 세심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친구의 숙수까지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운중보주가 애매하게 대답하자 성곤이 다시 확신하듯 말했다.

"혈간은 사흘 이상의 여정이라면 반드시 그 아이를 데리고 다니네. 이번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걸세."

중의가 끼어들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본 적도 없지만 만약 생존자라면 숨기는 의도야 뻔하지 않은가? 운중보마저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네. 또한 자신들 손으로 반드시 흉수를 잡겠다는 의미도 있네. 운중보의 분위기로 봐서 혈간을 시해 사건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감춘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라네. 푸줏간의 고기처럼 매달려 있던 두 놈 말일세. 그들이 누군지 청량이 모를 리 있겠나?"

"자넨 그들이 누군지 안단 말인가?"

성곤의 물음에 중의는 고개를 끄떡였다.

"자네는 혹시 동창의 비영조라고 들어보았나?"

"동창의 어둠 속에서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한다는 자들 말인가?"

"그렇다네. 그 놈들은 분명 동창에 소속된 자들이네. 북경(北京) 천마방의 역리라는 말은 동창에 소속된 인물을 의미하는 은어(隱語)라네. 그런 정도는 아마 청량도 이미 알고 있었을 걸세. 다만 애써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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