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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밀리자연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줄놀이를 하고 있는 채규철 교장.
두밀리자연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줄놀이를 하고 있는 채규철 교장. ⓒ 도서출판 선
채규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채규철’이라는 세 글자가 한동안 시선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진공상태가 되어버린 머릿속을 떠다녔다. 내 집 냉장고에는 채규철 선생님께 드리기로 했던 소곡주 한 병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걸, 어쩌면 좋은가.

얼른 옷장 안을 뒤적였다. 내가 가진 검은 양복은 얇은 여름 것뿐이었다. 신경질적으로 그걸 내어 입고 검은 넥타이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차를 몰았다. 현대 아산병원, 장례식장 25호실.

도착한 장례식장 입구는 채규철 선생을 기리는 수많은 학교와 단체, 기업에서 보낸 하얀 국화들로 꽃길을 이루고 있었다. 빈소에는 사고를 당하기 전의 사진, 그리고 ‘E.T할아버지’만을 기억할 이들을 위한 사고 뒤의 사진이 함께 놓여있었다. 나는 그 영전에 꽃 한 송이를 놓고 기도했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몇 차례 맴돌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BRI@내가 단 한 번, 선생을 뵌 것은 장기려 박사 전기 때문이었다. 작년 봄, 평생 아프고 배고픈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의사 장기려의 전기를 쓰기로 계약을 맺고, 계약금까지 받아 챙겼지만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나마 채규철 선생님이 장기려 박사와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 다리 건너 전화번호를 얻어 무턱대고 찾아갔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조용한 아파트 거실에서 채규철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한 점 성한 곳이라고는 남아있지 않게 녹아 내린 피부 속 한 쪽 눈에 대신 박혀있는 의안이 흘려대던 싸늘한 시선.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내밀던 손에 달려있던, 짐승의 것처럼 웅크려진 손가락과 그 끝에 고름딱지처럼 맺혀 굳어있는 손톱들. 그 참혹함에 나는 순간 숨이 막혔다. 간신히 소리를 죽여 침을 삼키며 한 손을 내밀어 마주잡았다. 그러나 어디가 손바닥이고 어디부터 손가락인지, 어떻게 손을 쥐고 어떻게 흔들어야 할지 난감했다.

“아, 그래…, 장 박사님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예, 선생님께서는 장기려 박사님과 많은 일을 함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장 박사 같은 사람 이야기는 왜 쓰려고 그래?”

대단히 마땅치 않은 목소리였다. 나는 당황했다. 혹, 두 사람 사이에 좋지 않은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너무 돈과 출세만 쫓으며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젊은이들에게 뭔가 보고 배울 만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선생은 그 녹아들고 오그라든 짧은 손가락 사이에 힘겹게 담배 한 개비를 끼워서 피워 물고는, 한숨처럼 ‘훅’하고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언젠가도 고신대 의대생 두엇이 찾아왔더라고. 장 박사님 이야기를 해달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 절대 그런 사람 본받지 말라고. 큰일 난다고. 공부 열심히 해서 의대 들어갔으면 의사 돼서 집안 돌볼 생각을 해야지, 장 박사가 뭐냐고.”
“예?….”
“그리고 말이야, 장 박사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그게 팔릴 것 같나?”
“….”

"장 박사 전기를 왜 쓴다고?"

채규철 선생님의 사고 전 모습
채규철 선생님의 사고 전 모습 ⓒ 채규철
농담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치 말년 병장 앞에서 희롱 당하는 전입 신병처럼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슬그머니 부아가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장기려 박사의 삶에 대해 알려달라고 찾아간 것이지, 책 출판을 허락 받으러 간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 이름이 뭐라구?”
“김은식입니다.”
“김우성?”
“김은식입니다.”
“김우석?”
“김, 은, 식 이라구요.”
“응, 김은석. 거 참 이상한 일이군, 이상한 일이야.”

선생의 녹아 내린 귀는 소리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두 번 세 번, 이야기를 거듭 큰 소리로 새기느라 지쳐갔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선생은 ‘이상한 일이야’라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추임새처럼 섞어 넣고 있었다. 첫 날부터 이 모양이니, 책을 도대체 어떻게 써가야 하는가. 내 입에서도 한숨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날, 첫 인터뷰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장 박사 전기를 왜 쓴다고?”

조금씩 다른 말로, 그러나 여러 차례 거듭된 질문이었다. 마치, ‘내가 자네에게 딸을 내주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 말해보게’ 하는 깐깐한 장인 같은 태도였다. 나는 그저 대충 이야기 마무리하고, 다른 분들 연락처나 몇 개 얻어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을 무렵이었다.

"저는 위인이란 이러저러하게 대단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읽는 사람 기만 죽일 것이 아니라, 우리하고 똑같은 삶의 고민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해나갔는지, 함께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생생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전까지 나온 책들이랑 자료들을 그저 짜깁기했겠지만 그런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 선생님을 찾아온 겁니다."

한껏 예의는 차렸지만, 목소리에는 골이 배어 있었다. 선생은 길지도 않은 대화 끝에 벌써 대여섯 개비 째 담배를 바꾸어 피워 물며 혼잣말을 흘렸다.

“이상한 일이지, 참 이상한 일이야.”
“선생님, 아까부터, 뭐가… 이상하다고 말씀하십니까?”

곧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선생의 귀가 어둡지만 않았더라도, 그 목소리에 섞인 불편한 기색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선생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절뚝, 절뚝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섬주섬 뭔가를 들고 나와 나에게 던졌다.

“자네, 지금은 장 박사님 전기 쓰느라고 바쁠 테니, 우선 이거 받아 가서 틈틈이 자료도 찾아 읽고, 인덱스 작업을 좀 하고 있게.”
선생이 내게 던진 것은 함석헌 전집 표지에 붙어있던 연보와 저작 목록이었다.
“이걸… 왜, 제게….”

“나랑 같이 함석헌 선생님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구”

"나 채규철은 장기려 박사님이 만들어준 몸뚱이랑 함석헌 선생이 만들어준 정신으로 구성된 사람이야. 지금도 가만히 누워서 그 두 분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싶고 그렇지. 그런데 요 며칠 자꾸만 함석헌 선생님 생각이 나서, 내가 다시 선생님 글을 하나씩 다시 읽고 있다고. 그러다가 내 이걸, 이 삶의 드라마를 말이야 그냥 무책임하게 사료로 ‘떡’하고 던지는 게 아니라, 그 드라마틱한 삶을 이야기로 만들어서 젊은이들에게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내 오늘은, 아침부터 ○○○작가를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하고, 나랑 같이 책 한 권만 만들자고 하려고 했어. 그런데 우연히 오늘 웬 젊은 작가가 하나 온다고 해서 어떤 놈인가 만나보기나 하자고 했는데, 자네가 왔구먼. 뭐 그 동안 어떤 글을 써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랑 같이 함석헌 선생님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구."

장기려의 삶을 물으러 간 사람에게, 난데없이 함석헌의 삶을 던진 것이었다.

"선생님, 그런데 저는 지금 장기려 박사님…."

그러나 날카로운 목소리는 가차없이 기어 들어가는 내 말머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한 눈을 지그시 감자, 홀로 부릅떠진 의안은 윙크치고도 위협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1964년 1월 16일. 정확할 거야. 그 날,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어. ‘삼남매 독살’ 이라는 제목인데. 엄마는 도망가고 아버지 혼자서 두 딸을 키우던 집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이미 수저까지 다 팔아먹고, 결국에는 움막 하나마저 팔아먹고 다음 날이면 길바닥으로 나가야 했던 밤에, 애들에게 독을 바른 식빵을 먹이고 자기도 자살했다는 이야기였어. 그런데 그 기사 한 쪽에 그 움막에서 발견된 애 일기장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거기 이렇게 써있는 거야. ‘아빠가 오늘도 식빵 사왔네. 엄마는 왜 안 오나, 보고 싶네. 아가가 자꾸만 울어서’ 라고. 애는 일기를 쓰는 동안, 아버지는 식빵에 독을 바른 거지."

나는 앞뒤 맥락을 알지 못한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날, 함석헌 선생님이 그 기사를 읽으시고는 머리를 빡빡 밀었어. 월남하신 뒤로 한 번도 깍지 않으셨던 머린데, 그걸 빡빡 밀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우시더라고. 그러고는, 조선일보에다가 ‘삼천만 국민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걸 쓰셨다고. ‘우리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더 이상 이렇게 소리 없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남의 일이라고 모른 체 하지도 말고, 더 이상 혼자만 잘 살아보겠다고 숨지 말고, 같이 살자고 말이지. 사람들이 그 날 기사를 읽으면서 세상에 제 자식 죽이는 부모가 어디 있냐고 침을 퉤퉤 뱉었거든. 그런데 선생님은 그게 아니라, 그건 우리가 죽인 거라고 하신 거지. 우리 모두가….”

선생의 말은 애매한 곳에서 맺어졌고, 나머지는 입술 속으로만 울리는 가쁜 숨소리로 흐려지고 있었다. 감았던 한 눈이 붉게 물들고 있었고, 한 손에 쥔 손수건은 부릅뜬 의안을 쓱쓱 문질러 닦고 있었다.

아뿔싸, 선생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울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부터 거칠어지던 호흡은 말 중간중간 목으로 차 오르는 걸 씹어 넘기는 소리였고, 붉어지는 눈은 눈물이 제 역할을 못해 잘게 터지고 있던 실핏줄의 흔적이었다. 채규철 선생은 이미 사십여 년 전에 당한 사고로 눈물샘이 녹아버린 사람이었다. 그것은 눈물 없는 울음이었다. 선생은 더 견딜 수 없게 된 순간 잠시 방안으로 사라졌다. 그 틈에, 나는 찬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흥분을 억눌렀다.

11월쯤에 소곡주 한 병들고 가겠다고 했는데...

채규철 선생님이 자비로 출간했던 책, 지금은 출판사를 옮겨서 나오고 있다
채규철 선생님이 자비로 출간했던 책, 지금은 출판사를 옮겨서 나오고 있다 ⓒ 내일을 여는 책
그리고 선생은 다시 색 바랜 문서 한 꾸러미를 들고 나왔다.

“뭐, 오늘은 장 박사님 얘기를 들으러 왔다니까 우선 장 박사님 얘기를 하자고. 그런데 뭐 그 인생이 재미가 있어야지. 그저 퍼 주고, 도와주고, 희생하고. 흔한 스캔들 하나 없는 인생. 허허허. 그에 비하면 함석헌 선생의 삶이야말로 드라만데…, 어쨌든 장 박사님이라….”

방에서 들고 나온 것은 장기려 박사에 대한 자료, 글, 책들. 그리고 그 때 함께 일하던 분들의 사진과 연락처들이었다. 그제서야 장기려 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그 뒤 결국 반년 여 만에 완성된 그 책의 가장 굵은 기둥이 되었다.

책이 출간되고, 선생은 한 번 읽어보지도 않은 내 글 앞머리에 추천사를 써주었다. 그리고 출판사 사장에게 간혹 전화를 걸어와 책 열 권씩을 주문해간 것이 벌써 대여섯 차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내 돈으로 사서라도 보내드렸어야 했던 것을…. 다시 선생께 전화를 드린 것은 올 여름 무렵이었던가 보다.

“선생님, 김은식입니다.”
“아, 김은식이. 김은식 작가. 책은 잘 봤어. 그만하면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선생님.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연락이 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 나를 찾아온다고? 내가 당장은 좀 바쁘고….”

선생의 어두운 귀는 이따금 반 타이밍을 타고 넘으며 죄스런 마음을 덮으려던 말장난을 유쾌하게 걷어내곤 했다.

“아… 예, 그러면 언제 시간이 되시겠어요?”
“내가 시월에는 미국엘 좀 다녀와야 하고, 십일월쯤에 보지.”
“예, 선생님. 전에는 제가 선생님이 뭘 좋아하시는 지 잘 모르고 과자를 사갔었는데, 이번에는 술 한 병들고 가겠습니다. 한산에 계시는 저희 장모님이 직접 소곡주를 담그시는데 맛이 괜찮습니다. 그것 한 병 가져가겠습니다.”
“아, 술? 호곡주라고? 호곡주 좋지.”

'호곡주가 아니고 소곡주라구요'라고 다시 한 번 설명하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예, 어쨌든 11월쯤에 그 술 한 병들고 찾아 뵙겠습니다.”
“어, 그래.”

지난 추석, 처갓집에서 채규철 선생님께 드릴 소곡주 한 병을 얻어왔다. 그러나 약속했던 11월은, 당장 아쉬운 일만 벗어나면 금세 무심해지는 내 못된 관성을 타고 흘러버렸고, 그 소곡주 한 병은 냉장고 한 켠에 가두어져 있다. 그리고 12월 14일 오늘. 야속한 부음이 달려와 내 뒤통수를 후려치고 말았다.

이 땅의 농촌과 아이들과 사람을 살려보려고 헌신했던 사람. 젊은 시절 덴마크에서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의료보험조합’이라는 아이디어를 내 장기려 박사와 함께 ‘청십자조합’을 세웠고,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시너를 뒤집어쓴 채 불이 붙어 온몸이 녹아 내리고 곱아드는 장애를 입은 몸으로도 오히려 병상에서 전해들은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할 길을 고민했던 사람. 그리고 결국에는 콘크리트와 입시경쟁 속에서 숨막혀 가는 아이들을 위해 ‘두밀리 자연학교’를 만들어 메뚜기와 함께 뛰어 놀고 별똥별을 세며 자라도록 했던 사람, 채규철.

한 순간도 안락하지 못했던 세월을 지나 아름답던 젊은 날의 사진 뒤에 영면하신 선생. 그러나 끝내 ‘나만 살겠다고 나서며 이웃의 죽음에 무신경한’ 세상 속에서 한숨 섞인 담배연기를 뿜어내야 했던 선생. 만 70세를 채우지 못하고 가신 뒷길에 아쉬움을 품는 것이 혹 우러러볼 줄이나 알지 한 걸음이라도 따라 걸을 엄두를 내지는 못하는 후생들의 못된 욕심은 아닐지, 영전에 기도를 올리며 나는 오히려 움츠러들어야 했다.

아, 채규철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소곡주 한 잔이라도 따라 올렸더라면….

덧붙이는 글 | 채규철 선생님의 빈소는 현대 아산병원 장례식장 25호입니다. 발인은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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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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