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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김수박
만화가 김수박 ⓒ 홍지연
발신지 없는 편지를 받아들고 다부동 숲속으로 숨어버린 옛친구 '칠칠이'를 찾아가는 '헐랭이'. 서울에서 다부동까지의 여정에는 헐랭이의 지난 서울 생활이 담긴다. 헐랭이는 김수박 자신. 실제로 자신의 서울 생활 중 2년을 잘라 넣었다. 고단한 도시 생활에 말을 잃은 누이를 이해하려 했던 김승옥처럼 김수박은 객지생활에 지친 이들에 위안을 던진다. 며칠 후 출간되는 그의 첫 장편 <아날로그맨>(1권·새만화책)이다.

6개월간 누리코리아에서 연재되다 기어이 중단됐던 이 작품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빛을 보게 됐다. 근 2년간 월세가 밀려 집주인 눈에 띄지 않게 숨어다니던 시간, 막일꾼으로 힘들게 끼니를 해결하던 기억이 담겨 있다.

@BRI@"2000년 고향(대구)에서 상경해 한 2년간은 만화로는 전혀 수입이 없었어요. 당장 돈을 안 벌면 밥을 못 먹을 지경이었죠. 고민하다 하루는 막노동을 나갔는데 돈을 딱 손에 쥐는 순간 '나, 서울에서 만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만화를 하면서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최후 보루가 생긴 거였죠.”

건축디자인을 전공했고, 당장에 써먹을 수도 있는 자격증도 있지만 일 때문에 만화를 못 그릴 것 같았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시간보다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릴 매체가 없다는 사실에 더욱 슬펐다.

"팍팍한 서울살이 담았죠”

김수박 첫 장편 <아날로그맨>이 출간된다
김수박 첫 장편 <아날로그맨>이 출간된다 ⓒ 김수박
한 PC통신을 통한 <김수박의 민들레>을 시작으로 그는 온라인 한 귀퉁이에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풀어나갔다. 자잘한 단편들이 생겨났고, '악진', '파마헤드' 등을 통해 자신과 비슷한 고민에 싸인 동료 만화가들을 알게 됐다.

김수박의 작품에는 현실에 부적응한 듯 혹은 달관한 듯한 캐릭터들이 울고 웃는다. 돈이 없어 사랑하는 여자를 더 잘난 이에게 보내야 하는 '말복이', 신림역 6번출구 보라매공원에서 언제 올지 모를 옛추억을 기다리는 '갑효형', 내무반의 폭력에 지친 강아지 '짬킹'의 젖은 눈에서 끝내 슬픔과 분노를 읽어내는 '헐랭이'까지.

그가 그린 지하철 1호선의 풍경엔 노숙자나 걸인이 주연을 차지하고, '장기 팔아 빚 갚으랴' 라는 광고판 문구가 자연스럽다. 식량난으로 '오리'와 '소'를 합성해 만든 대용식량품 '오리소'의 뜻하지 않은 횡포에 사람들을 구한다는 단편 <오리소 킬러즈>처럼 가끔은 엉뚱한 상상력으로 튀어보지만 그마저도 너무나 현실적이다.

처음부터 관심사는 온통 현실. 정확하게는 숨쉴 틈 없는 서울이란 공간 속 여러 사람들, 그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이다. 실재감 없는 것들은 그저 허무맹랑하다 믿기 때문이다. "너무 말랑말랑하잖아요? 낯간지러워서 싫어요” 삶에 닿아 있지 않는 것들에 대해 김수박은 본능적인 혐오를 드러낸다.

지하철 1호선을 무대로 한 단편 <사람의 곳>
지하철 1호선을 무대로 한 단편 <사람의 곳> ⓒ 김수박
모 광고가 외치듯 그의 만화들은 온전히 '사람을 향한다'. "현실을 좇는 게 아니라 사람을 좇는 거예요. 사람을 좋아해요. 사람을 관찰하고 그 사람의 행동, 감정을 알아가는 것을 좋아해요. 천차만별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애정이라면 애정일 수도 있죠. 그런 것들을 그려내는 것을 좋아해요.”

사람이 좋아 그린다

<아날로그맨> 중에서
<아날로그맨> 중에서 ⓒ 김수박
처음 단편집이 나올 때 곧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지만 나오는 순간 또 다른 욕심이 생기고 말았다. '더 깊어지고 더 괜찮아지고 싶다'. <아날로그맨>은 스위스에서 내년 여름 출간될 예정인데 작가 입장에서 썩 반갑지만은 않다고. "제 인간성이 더 깊어지지 못해서”이고 "한국인의 실생활을 여과없이 보여 자칫 오해를 살까 두려워서”다.

전작 단편들에 비해 과장이 줄고 실사에 가깝게 한결 차분해진 느낌인 <아날로그맨>은 다소 변한 그림체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일부 단편들에 보였던 논리적인 비약이 자취를 감추고 이야기의 구성은 보다 면밀해졌다. 그건 김수박이 투명하게나마 드리워진 막을 쳐내고 통유리처럼 시원하게 다 드러내 보여서인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게 그는 성장하고 있다. 지금은 어찌 딱히 규정받을 수도 없는 처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가란 언제나 나중의 일. 불특정 다수가 내릴 수 있는 상처에는 이미 마음을 비웠다. 살면서 조금씩 열리고, 보다 정직하게 나아가는 법을 깨닫게 되고, 어쩌면은 더 무뎌지는 게 사람살이인 것처럼 그의 만화도 그런 생을 경험한다.

"제가 느낀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싶어요. 로버트 크럼처럼. 수많은 선배 작가들이 만든 길들이 '모델'이 될 순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새 모델도 나올 수 있는 거거든요. 그렇잖아요? 편하게 흘러가는 대로, 되어가는 대로 이야기하는 거죠.”

조만간 '헐랭이'가 '칠칠이'를 만나 그의 지난 이야기(2권)를 듣는 때도 올 것이고, 김민기, 김창완, 조PD처럼 좋아하는 노래들이(<유쾌한 노래방>)도 세상 빛을 보게 될 거다. 하지만 정말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가 랩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거침없이 삶을 그대로 쏟아내기 때문이고, 자신의 만화도 그 랩처럼 됐으면 좋겠단다. 어느 낯모르는 이가 자신의 그림을 대하고 그저 한 번 웃어주거나 멈춰 생각할 틈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러니 그는 "만화가가 돼 참 좋다”.

새록새록 솟아나오는 사람에 대한 연민을 끌어안는다. 자신의 일상을 담아내는 것으로 그의 노력이 이어진다. 고되고 고되지만 팍팍하지 않다, 살아 있으므로. <아날로그맨>의 한 장면처럼 어느 늦여름, 막일을 마친 더운 어깨에 뚝뚝 샤베트를 닮은 눈이 내려앉을지 모를 일이다. 고단한 일상을 다독이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별을 쏘다'는 2030 젊은 만화가들의 열정과 작품세계, 인생을 엿보는 CT News의 고정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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