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미니 장승만들기 체험. 조각칼을 들고 장승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진지하다
미니 장승만들기 체험. 조각칼을 들고 장승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진지하다 ⓒ 유신준
'한국의 일상' 첫 날이다. 첫 날 일정은 우리 지역의 오래된 절 장곡사를 둘러보고 인근 부여 박물관을 구경하는 문화유적 코스. 특별히 시간을 정한 일정도 없어 우리는 실컷 늑장을 부리다가 오전 11시쯤 집에서 출발했다. 장곡사 가는 길에 장승공원에 잠시 들렀다. 방문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군이 조성해 놓은 장승테마파크다.

장승은 그들이 처음 보는 물건. 오래된 것과 전통 있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토시에게 좋은 구경거리다. 그는 가지각색의 장승들 사이에서 생김새를 자세히 살피며 신기한 풍물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다. 옛날 마을의 수호신이었다는 내 설명에도 고개를 끄덕여가며.

장승공원 한쪽의 장승 체험코너가 눈에 띄었다. 전통 한옥구조에 기와를 올린 아담한 건물이다. 그곳에서 담당자의 안내에 따라 손가락만한 크기의 나무에 미니 장승을 만들었다. 사토시는 손놀림이 제법 능숙하다. 노리코씨는 학교 때 뭔가를 만들어 본 후 처음이라며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안내하시는 분의 도움으로 자신들이 만든 것을 목에 걸어 보고는 슬그머니 미소 짓는다. 결과물이 내심 흐뭇한 모양이다.

담당자가 시범을 보이느라 만든 것을 선물이라며 노리코씨에게 건넨다. 그의 예술적인 사인까지 곁들여. 이곳으로 첫날 코스를 정하길 잘했다. 첫 방문지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 그가 건넨 훈훈한 인정은 노리코씨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장곡사 구경에 나섰다. 걸어서 왕복 20분정도. 길가의 은행나무는 이파리를 모두 떨구고 겨울날 채비를 하고 있다. 간혹 이는 바람에 길 위의 노란 은행잎만 뒹군다. 쨍하게 맑은 날씨지만 산골이라 제법 쌀쌀하다. 사토시의 티셔츠 차림이 걱정되어 괜찮으냐고 물으니 원래 추위에는 강하단다. 자기는 집안에서 늘 반팔 티셔츠만 입는다며 웃는다. 우리는 11월의 청명한 햇살아래 호젓한 산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장곡사에서 만난 산채 비빔밥

칠갑산 장곡사. 천년을 지켜온 정적속에 지금도 홀로 넉넉한 곳
칠갑산 장곡사. 천년을 지켜온 정적속에 지금도 홀로 넉넉한 곳 ⓒ 유신준
장곡사는 칠갑산 아래 있는 아담한 절이다. 통일신라 문성왕때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찰로는 독특하게 상하대웅전이 있는 구조로 유명하다. 천년고찰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위에서 내려다보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절집들이 사뭇 다정하게 다가오는 곳이다.

11월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방문객도 별로 없다. 가끔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흔들려 절의 고적함을 깨울 뿐 절은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다. 법당 앞을 지키던 개도 어디 가서 낮잠이라도 자는지 보이지 않는다. 천년동안 지켜온 정적이건만 장곡사는 그 정적속에 홀로 넉넉하다.

점심은 장곡사아래 식당에 산채비빔밥으로 준비하고 B부부를 초대했다. 그네들과는 형제처럼 지내는 막역한 사이. 어제 시간을 내어 수고해 준 고마움을 전하고 노리코씨네를 정식으로 소개하기 위한 자리다. 노리코씨가 B를 만나자 마자 어젯저녁에 감사했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사람의 사귐은 마음을 전하는 일로 시작된다. 그녀의 서툰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로 자리가 넉넉해진다. 비록 말 한마디를 건넸을 뿐이지만 그 한마디에 담긴 고마운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서로 알 수 있기 때문이리라. 고마운 마음이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어지고 사귐의 지경은 그렇게 넓어지는 것이다.

정갈하게 차려진 점심상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10가지 정도를 넘나드는 찬으로 구성된 평범한 점심이다. 차려진 반찬의 가짓수와 양에 사토시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간소하게 차려먹고 남기면 결례가 되는 음식문화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한국의 보통 점심상은 이미 보통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이걸 다 먹어야 하냐는 것이다. 남겨도 된다고, 걱정 말고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맛있게 먹으라고 말해줬지만 어디 문화적응이 쉬운 일인가. 노리코씨는 한국음식을 맛본 경험이 몇 번 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에게는 처음 겪는 일. 가히 문화의 충격이다.

@BRI@그에게도 강점은 있다.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면 한국여행이 괴로운 추억이 되겠지만 그는 걱정할 것이 없다. 그의 집 식탁에는 고춧가루가 상시비치 품목이었으니까. 그러니 사토시에게 매운 한국음식은 물 만난 고기격이다. 오고 싶었던 김치의 나라에서 매운 음식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것저것 몇 가지 먹어보더니 맛있다며 잘 먹는다.

반찬으로 두부와 묵이 함께 나왔다. 두부는 일본에도 있는 음식이지만 묵은 그들이 처음 접하는 음식이다. 본래 수저 없이 젓가락만 사용하는 사람들이니 두부를 김치에 싸먹는 일 정도는 제법 능숙한데, 묵을 간장에 찍어먹는 일에서 결국 난관에 봉착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끈거리는 묵을 스테인리스 젓가락으로 잡으려니 그게 어디 쉬운가(그들은 나무젓가락을 사용한다). 점심상에서 생각지도 않은 강적을 만나 고전하는 사토시 때문에 때 아닌 웃음판이 벌어졌다.

손님대접에 술이 빠질 수 없어 동동주를 한 병 시켰다. 달착지근한 동동주가 맛있다며 한 잔씩 달게 비운다. 노리코씨는 더 마시고 싶지만 여자가 한낮에 얼굴이 빨개져 돌아다니면 '국제적인 망신'이 될 것이므로 아쉽지만 그만해야겠단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면 집에 두고 온 사람이 걸리는 것은 정한 이치. 노리코씨 입에서 자연스레 우츠노미야씨 이야기가 나온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남편이 귀국할 때 꼭 한국 막걸리를 사오라고 했단다. 자기는 어떻게 구입해야 하는지 잘 모르니 나에게 꼭 기억해 두란다.

백제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토시

나의 약점을 더불어 즐기는 것이 유머의 기본. 그는 유머로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
나의 약점을 더불어 즐기는 것이 유머의 기본. 그는 유머로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 ⓒ 유신준
점심 식사 후에는 부여로 이동했다. 부여박물관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박물관 방문은 사토시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우리 백제사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번 방문계획을 준비하면서 부여박물관에 전화를 했었다. 일본어로 해설하는 분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냥 둘러보는 박물관은 별 재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무미건조한 박물관이란 재미없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고역이다. 나에게도 박물관은 그리 친근한 장소가 아니긴 마찬가지.

언젠가 해설하는 분을 따라 박물관을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달랐다.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박제된 유물들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솜씨라니. 그때의 좋은 기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아 박물관 관람은 반드시 전문가의 해설이 필요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본어로 해설해줄 분을 구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사토시에게 박물관에서 유료로 대여하고 있는 통역헤드폰을 씌워줬다. 일본어판 안내서가 있지만 그의 관심분야니 좀더 자세한 해설을 들려주고 싶어서다.

간단한 내용이라면 내가 어떻게 대충 때워 볼 수 있겠지만 백제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그에게 내 서툰 통역이 달가울 리 없다. 역사에 문외한인 내가 어쩌면 한수 배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등에서 진땀나는 일이 아닌가. 이럴 때는 통역헤드폰 씌워놓고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는 왜 백제사에 관심이 많은 걸까. 혹시 백제와 일본은 가까웠기 때문이 아닐까. 그건 서로의 역사에서 수시로 확인되는 사실이니까. 옛적에 무람없이 서로 주고받으며 살았던 시대를 더듬으며 같은 문화의 원류를 확인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사이를 흐르는 알 수 없는 동질감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싶어 하는 건지도.

풍성함과 알뜰함의 사이에서

한국식 손님접대문화는 손님이 배불리 먹고 남길 정도의 넉넉함이라는 것을 알지만...
한국식 손님접대문화는 손님이 배불리 먹고 남길 정도의 넉넉함이라는 것을 알지만... ⓒ 유신준
'못다이나이!'. 부여에서 꽤 유명하다는 쌈밥집에서 풍성한 저녁상을 받고 노리코씨가 한 말. 아깝다는 뜻이다. 음식 가짓수가 많은데다 양도 많으니 도저히 다 먹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음식에서 문화의 차이를 확인한다.

전후 어려운 세월을 살아온 그녀는 음식을 남기는 일에 대해서 죄책감 같은 게 있다고 한다. 알맞게 차려서 남기지 않고 알뜰하게 먹는 그네들의 문화로 따지면 우리의 음식문화는 낭비적 요소가 많다. 그녀가 한국식 손님접대는 손님이 배불리 먹고 남길 정도의 넉넉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그네들의 태생적인 알뜰함을 하루아침에 떨쳐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네들은 식사 때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이 예절이다. 초대를 받아 음식을 남기는 것은 한편으로는 맛이 없다는 표현이 되므로 실례를 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상위에 놓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며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로마에서는 로마사람이 되라. 일단 한국에 왔으니 우리식으로 하자고 했다. 젓가락을 거꾸로 들고 덜어 먹지도 말고 별도의 나눠먹는 접시가 없으니 찌게는 숟가락으로 직접 떠먹으라고 일러줬다. 음식을 공유하며 함께 먹는 문화 속에서 따뜻한 정이 생겨나는 거라며.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고 한다. 각각 생겨난 기반이 다른 것이니 서로 인정하고 수용하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열을 없다 해도 비합리성과 불편함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사시간에 음식을 통해 풍성한 우리네 정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결코 우리 방식이 옳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빠진 듯 허전해졌다. 풍성함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낭비적 요소와 음식물 쓰레기 문제가 개운치 않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음식문화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날마다 드나드는 음식점의 음식 가짓수에 대해서 한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같은 가격이면 인심 좋게 많이 주는 곳이 좋은 것이고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것이야 으레 남들도 그러려니 했다.

우리음식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소중한 것을 깨달았다. 필요한 것을 먹을 만큼씩 장만해 간소하게 먹는 그들에게서 느껴야 할 점이 많구나. 한 해 동안 음식물쓰레기로 15조원을 낭비하고 세끼 중 한끼를 버리고 있다는 우리의 통계가 새삼 부끄럽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창간정신[모든 시민은 기자다]에 공감하는 시민. 보통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좋은 세상 위하여 기자회원 가입. 관심분야 : 일본정원연구, 독서, 자전거여행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